고전 번역가

명(明)나라 말기에 만주족은 인구가 100만명에 불과했다. 한족은 2억명에 달했다. 하지만 만주족 8기군(八旗軍) 15만 병사가 북경에 진입하자 명나라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만주족은 청나라를 세운 후 268년 동안 대륙을 통치했다.

그런데 한(漢)족들은 자존심을 내세워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다. 청나라 역시 그런 한족을 배제하고 철저히 강압적인 철권통치로 일관했다. 4대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하자 두 민족 간 태도가 달라졌다. 강희제는 한어를 배우고 한족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저명한 학자 이곽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무려 7번이나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실력 있는 선비들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했다. 하지만 한족들은 단 한명도 응시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강희제는 커다란 협상 카드를 내놓았다. 명나라 역사 편찬을 만주족이 아닌 한족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러자 과거 응시생이 몰려들었다. 또한 강희제는 청나라가 발전하려면 한족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만주족의 기상과 한족의 문화 자긍을 결합하는 의미로 음식을 함께 배열하여 한 상에 같이 앉도록 했다. 화해가 나라 발전의 기틀이 됐던 것이다.

황제는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존재다. 공문서에 황제라는 단어가 나오면 줄을 바꾸어 써야 했다. 황제와 이름이 똑같은 글자는 누구도 쓸 수 없다. 모든 문무백관들이 북쪽으로 배례할 때 황제만이 남쪽을 볼 수 있다. 위엄과 권위와 화려함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강희제는 달랐다. 극히 소박했다. 그 이유가 너무도 간단했다.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뿐이지,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드는 것이 아니다.”

강희 14년, 황후로부터 얻은 아들 윤잉을 황태자로 봉했다. 갓 돌을 넘은 아이였다. 하지만 30년이 지나자 태자의 권세가 황제를 넘보게 되었다. 강희제는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신하들의 충성된 상소를 외면하지 않고 과감히 태자를 폐위시켰다.

“너는 황태자가 되어 조상의 덕을 지키지 않고, 황제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권력을 남용해 당파를 구성하여 백성들 앞에서 횡포를 부리고, 음란을 탐하고, 국고를 도둑질하고, 감히 국정에까지 관여하니 일일이 그 죄를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오늘부로 황태자의 자리에서 폐위하노라.”

황제도 아픔과 연민을 아는 인간이었다. 황태자를 폐하고 70일을 슬픔 속에 살았다. 하지만 당파가 사라지자 정치가 안정되었고 백성이 살기 좋아졌다. 황제는 백성의 신하이기 때문에 국정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죽는 그날까지 쉴 수가 없다. 이것이 강희제의 정치철학이었다. 문무백관들은 퇴청하면 집에서 쉴 수 있지만 자신은 쉴 곳이 없었다. 일과가 끝나면 침소에 들기 전까지 상소를 읽었다.

“황제가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게 된다.”

이는 중화민국 무렵 편찬한 ‘청사고(淸史稿)’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국궁진력(鞠躬盡力)이란 백성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낮춰 온힘을 다해 맡겨진 일을 이룬다는 뜻이다. 강희제가 좌우명으로 삼은 구절이기도 하다. 중국 정치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대 황제를 꼽으라면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가 단연 1위다.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저 백성을 위해 자신의 온 심혈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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