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수필가

시골병원에서 퇴원한 아버지가 보훈병원으로 가셨다고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작은 올케하고 응급실에 도착하니 나지막한 간이의자에 허름한 청색 가방이 먼저 나를 반긴다. 늘 앞장서며 아버지를 이끄는 가방이 가지런하게 벗어놓은 점퍼를 지키고 있다.

집에 다른 가방도 많은데 아버지는 왜 낡은 가방만 가지고 다니시는지 알 수가 없다. 여든을 눈앞에 둔 편찮으신 아버지가 제천에서 신탄진까지 혼자 기차를 타고 온 것만 해도 마음이 불편한데 다 낡은 가방을 보니 더 속이 상했다. 갑자기 병이 나신 어머니는 어쩔 수 없지만, 근처에 사는 오빠나 동생들은 뭘 하고 아버지를 혼자 병원에 오게 하는지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입원 절차를 마치고 병실로 올라와 가방을 정리하는데 와락 눈물이 쏟아진다. 가방 속에서 먹다 만 빵조각과 비닐봉지에 싼 음료수병이 나온다. 팬티 한 장과 양말 한 켤레, 틀니, 칫솔, 수건, 약봉지, 화장지, 휴대전화 충전기까지 작은 가방이 많이도 집어 먹었다. 아버지 성격만큼이나 꼼꼼하게 챙긴 것들을 꺼내놓으니 한 보따리다. 물건을 서랍에 넣으며 밥을 드셔야지 왜 빵을 드셨느냐고 하니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게 없다고 하신다.

시골 병원에서 일주일을 있어도 병명을 모르더니 검사 결과 폐렴이란다. 어머니 없이 혼자 일주일을 계시던 아버지는 얼른 퇴원해야겠다며 내가 병원에 갈 때마다 가방을 꾸렸다. 의사선생님의 퇴원 허락도 안 떨어졌는데 가방은 병원에 들어올 때보다 더 살이 오른 채 아버지가 일어설 때만 기다렸다.

퇴원하던 날, 집으로 가겠다고 하는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비어 있던 방을 치우고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아버지는 거실 한쪽 맨바닥에 가방을 끌어다 베고 잠이 들었다.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하니 괜찮다며 입은 옷 그대로 또 눈을 붙인다. 베개를 갖다 드려도 마다신다. 무슨 귀중한 보물이나 든 것처럼 가방은 누울 때나 기대어 텔레비전을 볼 때나 이래저래 아버지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

딸네 집이 그리 불편하실까. 기껏해야 2년에 한 번 정도 다녀가는 아버지는 늘 손님처럼 왔다 가신다. 같은 자식인데 꼭 못 올 데 온 것처럼, 하룻밤 주무시는 것도 불편해하니 한편으론 서운한 생각이 든다. 수건도 집에 것을 쓰지 않고 당신 가방에서 꺼내 쓴다.

출가한 딸도 자식인데 당신 집처럼 편안하게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라도 내가 불편해할까 봐 당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는 아버지를 볼 때면 속이 상한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가 빼놓은 틀니가 비좁은 세숫비누 곽에 담겨 있다. 내가 갖다 놓은 컵은 세면대에 그대로 있고 비누 곽 뚜껑 안에 들어 있는 틀니를 보니 또 마음이 편치 않다. 컵에다 틀니 담으라고 내가 했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다. 딸한테 틀니 담을 컵 한 개 달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불편한 일인가.

아버지 연세의 다른 분들도 그러실까. 여든의 나이면 이제 세상 사는 일에 거침없을 때도 된 듯한데 아버지는 아직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신다. 자식이 육 남매나 되지만, 자식한테 의지하는 법이 없다. 제사나 친인척 간의 애경사도 손수 챙기고 병들어 자리에 눕기 전까진 자식들 신세 안 지고 어머니와 두 분이 따로 살겠다고 하신다. 그런 깔끔한 성품에 귀까지 어두우니 아버지의 일상은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두커니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웃는 아버지를 볼 때면 무슨 소린지 알아듣고 웃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때로는 아버지 귀의 보청기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보다 클 때도 있다. 친정집에 안부전화를 걸어도 알아듣지 못하니 서로 마음만 소란스럽다. 내가 누구라는 것을 밝혀도 더는 대화가 진전되지 않으니 슬그머니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가 잦다. 그런 세월이 벌써 20여 년이 넘은 것 같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군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젊었을 때부터 귀가 어두웠었다. 자랄 때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철없이 웃었던 적도 있다. 그때 이유 없이 깔깔거리며 웃는 딸을 보는 아버지 마음은 어떠했을까. 요즘은 옆에서 큰 소리로 말해도 못 알아듣고 엉뚱한 행동을 하신다. 그럴 때면 가슴이 에이는 것만 같다. 귀가 어두우니 아버지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고 온종일 같이 지내도 서너 마디밖에 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대화하다 소통이 안 되니 충돌이 일어나고, 경로당 어르신들하고도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기기도 하나보다. 그런 아버지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아버지께 해 드린 것이 없다. 약골로 태어나 클 때도 무던히 애를 태웠다더니 쉰이 다 되었어도 아버지에겐 여전히 아픈 손가락이다. 결혼해서는 시부모님 모시느라 친정 부모님은 늘 뒷전이었다.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친정을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했다. 내 자식이 중해 내 새끼 나이 먹는 것만 가슴 벅차하고 아버지 연세 드시는 것은 모르고 살았다. 어쩌면 아버지 옆에 붙어 다니는 가방보다도 내가 더 아버지를 무심하게 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아침 숟가락을 내려놓고 아버지는 서둘러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낸다. 무에 그리 급한 건지 기차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역에 가서 기다리겠다며 나설 채비를 하신다. 아버지가 일어서자 가방이 앞장서며 아버지를 재촉한다. 친구처럼 아버지와 같이 늙어가는 가방은 아버지의 급한 성미를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차표를 사고 5만원을 꺼내 아버지 손에 쥐여 드리니 한사코 안 받겠다 하신다. 플랫폼을 빠져나가면서 감기 드니 얼른 들어가라며 나를 향해 연방 손을 흔드신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아보는 아버지가 다 낡은 가방처럼 힘에 겨운 듯 걸어가신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