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희 음성 남신초등학교 교감

이덕남 여사에게는 그런 긍지가 있어서 말씀 소리도,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아버지지만 단 한 점의 오류나 부끄럼이 없다는 걸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반면 신씨 집안에 와서 고생한 것을 회한삼아 말씀하실 때에는 평탄치 않은 일생이 읽혀져서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부디 오래 건강하시기를 기원하였다.

단재선생과 북경대 도서관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선생은 이 대학의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2016년 10월 17일 수신공문을 보니 진천군 덕산면에 세워지는 학교명이 서전중, 서전고라고 하니 독립투쟁정신을 계승한 것 같아 고마웠다. 용정중학기념관에서 이상설 선생이 세운 서전서숙이라는 푯말을 보고 우리 모두가 교과서의 글로만 근현대사를 배울 일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러 머나먼 간도땅으로 건너간 사람들의 역사현장, 독립투사들의 터전을 직접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아마도 멀리서 바라본 일송정과 해란강은 우리 조상들의 투쟁과 피끓는 마음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용정에서 몇 시간을 달려서 이도백하에 도착해 백두산에 올랐다. 백두산 초입부터 빽빽한 삼림이 주는 위용은 이미 남의 나라 땅이 된 백두산에 대한 억울함과 감탄이 뒤섞여 탄성으로 새어나온다. 활화산인 백두산이 주는 온천과 백두산 전체에 쌓인 백설과 거침없이 떨어지는 폭포, 넓디넓게 퍼진 백두산을 보니 더더욱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치밀어 오른다. 백두산의 위용과 기개 속에 천지를 바라본 선생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어찌 높이지 않을 수 있었으랴! 어찌 고대사에 애정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으랴! 만주벌판에서 말 달리며 호령하던 조상의 거친 숨소리를, 산이라도 떠옮길 듯한 기세를 느꼈을 것만 같다.

집안으로 발길을 돌려보니 고구려박물관이나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릉, 국내성터는 동북공정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으며, 중국과의 국제 외교적 쟁점화의 빌미를 줄까 싶은 두려움에 현수막도 펼치지 못해 더욱 안타까웠다.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만난 광개토대왕릉비는 보기만 해도 고구려인의 기상이 엿보였다.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서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한 단재선생의 명언이 떠올랐다.

고구려인이 통일을 이루었다면 만주벌판을 달리고 있었을 터였다. 백두산에 오르고, 천지를 본 우리 민족이 반도에 갇혀있지 않았을 거라는 것과 만주벌판을 누비며 땅 끝까지 영토를 확대하고자 했을 거라는 건 우리 민족의 기상을 천 배 만 배 떨치고자 하는 의지였으리라. 그런 까닭에 단재선생을 ‘마지막 고구려인’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국내성터나 광개토대왕릉은 원형이 허물어져서 왕릉과 성터라는 것을 알려주는데 쓸쓸하기 짝이 없다. 그에 비하면 장수왕릉은 외형만이라도 보존되어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어깨가 으쓱 올라가게 해주었다. 부디 동북공정으로 우리의 소중한 역사가 남의 손에 무참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뤼순에 도착해 뤼순감옥과 관동법원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던 곳이라 그런지 10월 중순인데도 불구하고 건물의 찬 기운이 등골을 스친다. 이 차가운 법정으로 오직 수의만을 걸친 채, 나라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만을 품은 채 법정에 들어섰을 안중근 의사의 모습! 법정에서의 결연한 표정의 그 얼굴, 사형 5분 전의 선연한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단재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려다 체포되어 뤼순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감옥에 갇혀서도 집필활동을 계속하며 민족이 나아갈 길을 열어주려 한 당신, 그 꼿꼿한 정신만이 오롯이 살아 우리들 가슴에 뜨거운 덩어리로 남았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뜨거운 물음이 내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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