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시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49재를 길상사에 모셨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께서 입적하신 절이다. 경내가 수려하고, 참배객이 많아 외로운 마음을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불쑥 절을 찾아가곤 했다.

극락전에 들어서면 법당 왼쪽에 49재를 모시는 혼령들의 영정사진이 십여개 놓여 있었다. 그 곳에 올려놓은 어머니의 사진은 어느 화창한 봄날 남편이 마당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 속 어머니는 온화한 미소로 나를 맞이하건만 나는 매번 눈물이 앞을 가려 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단 위에 올려진 영정사진 속 망자들의 표정은 각기 다 달랐다. 대개 근엄한 모습이 많았지만, 어쩌다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올라오면 선뜻 눈길이 갔다. 젊은 망자의 사진을 바라보다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했다. 사진들은 나름대로 사연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어느 날 특이한 영정사진이 올랐다. 등산복 차림의 초로의 사내가 바위 옆에 서서 모자를 흔들고 있었다. 영정 사진이 아니라 산에 놀러 갔다 찍은 스냅사진을 올려놓은 듯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아마도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해 두지 않아 황급히 급조했는가 보다 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친정의 친척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영정사진 때문에 쩔쩔매다가 급히 그림으로 그린 것을 찍어서 올렸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렇지 요즘 같은 스마트 폰 시대에 저리도 활달한 양반이 변변한 사진 하나 없었을까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법당에 들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사진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생경스런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생면부지의 그였지만 점점 호기심이 일었다. 불경하게도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표정을 살폈다. 산 정상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한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으로 모자를 벗어 흔들며 서 있는 그분의 얼굴에는 만족한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나는 그 상쾌한 기분을 잘 안다. 특히 더운 여름 정상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는 순간! 꿀맛 같다. 그도 분명 그 절정을 알고 있었으리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날렵하게 산을 휙휙 날아다녔음이 분명했다. 그 정복의 순간 모자를 벗어 흔드는 그 기분!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그 찰나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그는 영정사진으로 이 사진을 쓰라고 유언했을 것이다. 그 유지를 받든 유족들도 망자의 빛나는 순간을 간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파격적인 이 사진은 슬픔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법당을 조금이나마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 앉는데 문득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난데없는 음성이 들렸다. 그 순간 사진은 모자를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잘 있거라! 나는 한바탕 신나게 잘 살고 가니 너희들은 부디 너무 슬퍼 말아라! 너희들도 여한 없이 재미나게 살다 오너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나는 망자의 인사를 정신없이 듣고 있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 멍해진 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며 바라보니 사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법당에는 적막이 내려앉고 있었다.

문득 죽음이 슬픔의 색채를 짙게 드리울 때 위로가 되어 준 글이 떠올랐다.

장자(莊子)는 아내의 장례식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대자연의 이치에 따라 기(氣)가 움직이는 것이 죽음이기에 슬픈 일이 아니라고 했다. 스위스의 철학자 칼 힐티(karl hilty, 1833~1909)는 “죽음은 밤의 취침, 아침의 기상이라는 과정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다만 커다란 과정이다” 이라 했으며,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 1926~2004)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며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곳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 거예요.” 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시인 천상병(1930~1993)은 그의 시 ‘귀천’에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삶과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의 경지에 새삼 고개가 숙여졌다. 죽음의 반대말은 삶이 아니라고 한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란 작품에 “그가 죽자, 그토록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죽음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갔다”라고 쓰고 있다.

죽음은 삶이 껴안고 있는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하루 하루 무럭 무럭 늙어가고 있는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 저렇듯 활짝 밝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해학을 담은 그 영정사진 덕분에 슬픔이 조금은 휘발되는 느낌이 들었다.

즐거운 순간들은 가슴에 오래 머문다 했다. 마치 저 사진처럼. 그런 기억들은 시간을 초월해 영원히 남아있게 될 것이다.

행복했다는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면! 진정으로 지금의 삶을 사랑한다면 죽음이 한없이 두렵거나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나는 가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석양이 법당문을 밀고 들어왔다. 사진 속 어머니가 환하게 웃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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