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공산성 북면 구릉에 금강을 바라보며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작은 사찰이 있다. 만하루에서 금강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면 바로 거기에 영은사(靈隱寺)가 단아하다.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가 사천왕이 되어 부처님을 호위한다. 쌍수정으로 오르는 낮은 산줄기가 절집을 품에 안았다. 연지에 기다랗게 내 그림자를 드리우고, 진홍대단에 공주대학교를 수놓은 금강을 뒤로하며 영은사로 건너간다. 마당이 넓다. 마당 끝에 은행나무는 정진의 열음을 노랗게 쏟아놓았다. 밟으면 냄새가 지독한데 스님은 왜 썩어가는 은행을 쓸어내지 않았을까? 껍데기 속에 숨어 있는 무한한 해탈을 기다리는 것일까?

관일루는 금당인 원통전을 뒤에 숨겼다. 영은사가 승병을 양성하던 사찰이었다면 관일루는 호국 의기를 불법으로 벼리려 모여든 스님들의 강당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의 합숙소로 쓰이기도 했으며 여기서 조련된 승병들이 영규대사의 지휘 아래 금산 전투에 참여했다고 한다. 광해군 때부터 승장을 두어 승병을 관장하게 했다는데, 한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서산대사, 평양성을 수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명대사, 청주성을 수복한 영규대사가 대표적인 승장이었다. 과연 영은사는 호국불교의 성지라고 할만하다.

관일루는 이름처럼 금강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로 바라볼 수 있다. 금강 건너 푸른 산 아래 공주대학교 캠퍼스가 아름답다. 편액은 ‘관일루(觀日樓)’가 아니라 ‘영은사(靈隱寺)’라 걸려 있다. 편액이 걸린 전면 벽에 심우도(尋牛圖)를 그렸다.

불화는 대개 측면이나 후면에 그리는데 전면에 그려 놓으니 마당에서 행자가 소를 찾아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보면서 견성의 과정을 바로 알 수 있어 좋았다. 환갑 지난 나이에도 소를 찾을 염도 내지 못하니 내게 도(道)란 푸른 하늘에 뜬구름일 뿐이다. 관일루를 뒤로 돌아가니 바로 원통전(圓通殿)이다. 정면 3칸의 작고 아담한 전각이 충남도 문화재자료 51호이다. 관일루나 요사채의 단청도 아름답지만 원통전 단청은 더 아름다웠다.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모셨다. 목조관음보살좌상도 유형문화재이고, 아미타 후불탱화, 월성탱화, 신중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 등 불화 5점이 모두 문화재나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은 소중한 유물이다. 관음보살님이시여! 세상 모든 아픔의 소리를 다 들어 살펴주소서.

영은사는 조계종 마곡사의 말사이다. 안타까운 것은 사적기가 없어 사찰의 기원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 세조 때 사액 사찰로 지었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사실은 백제 때 사찰이라고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탑재와 초석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이라고 한다. 분명 백제 때 왕궁의 내불당의 역할을 했겠지만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 시대에 승병 양성의 호국사찰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역사는 삶의 족적이고 후세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 족적이 공이든 과이든 적의 발걸음이든 나의 발걸음이든 현재의 내디딤의 방향을 일러준다. 그런데 승자는 패자의 족적을 지우고 싶어 한다. 옛 족적이 아름다울수록 오히려 더 깨끗이 지워버리려 한다. 그러나 여기 무수히 밟혀 뭉그러진 은행 알이 미래라는 가능성의 열매를 기약하듯 역사는 누구도 밟아 뭉갤 수 없는 해탈의 씨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산 그림자가 어둑어둑 내려앉은 절집은 붉게 타는 강물만 무심히 바라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