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왕궁지에서 비탈길을 조금 내려가면 진남루이다. 시가지에서 올라오는 길이 누각 아래 문으로 통한다. 진남루는 공산성의 주요 출입문이다. 대개의 건축물이 남쪽이나 동쪽에 정문을 내는 것으로 보아 진남루가 남문이며 정문이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삼남의 관문이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석축 기단에 건물을 2층으로 세워 위엄을 보였다. 이 건물은 백제시대의 건물은 분명 아니고 조선 초기 성을 석축으로 개축할 때 지은 것을 여러 차례 다시 세웠다고 한다. 진남루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너른 길은 성내로 통한다. 여기서 바로 남으로 가파르게 오르면 연등루를 거쳐 광복루(光復樓)에 이르게 된다.

영등루로 오르면서 아래로 남쪽을 내려다보면 흙으로 쌓은 위에 돌로 쌓은 산성이 보인다. 이와 같은 축성법을 전문가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왜냐하면 대개 토석혼축산성인 경우 아랫부분에 돌을 쌓아 튼튼히 하고 위에 흙으로 쌓아 올리거나, 외부는 돌을 쌓고 안쪽에 흙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산성은 백제시대에 흙으로 쌓은 성을 조선시대에 돌을 쌓아 개축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여기서 약 400m쯤 되는 토성이 보인다. 내 눈에는 겹성처럼 보였다. 아는 눈에만 보인다는데 무지한 내 눈을 한탄하면서도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무 계단을 밟고 올랐다. 여기는 석축한 부분처럼 돌로 아랫부분을 쌓고 윗부분을 조금 들여서 쌓아올려서 안정감이 있어보였다. 옛날에 토성을 쌓기 위해서 필요한 많은 흙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궁금하다.

광복루에 오르니 가장 높은 마루에 임류각이 있고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가 있다. 이곳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작은 산이 있고 정상에 보조 산성지가 보인다. 아마도 동서로 있다는 보조 산성이 아닐까 한다. 북으로 비탈길을 내려간다. 청룡기는 검은색 현무 깃발로 바뀌어 어느덧 저녁 바람에 나부낀다.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 숲 그늘이 어둑어둑하다. 내리막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경사가 급한 곳을 계단을 밟아 내려가니 바로 연지만하루이다. 영은사 쪽에서 내려오는 성안의 물이 강으로 빠지기도 하고, 금강 물이 성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만하루는 전망대도 보루도 아니다. 아마도 벼슬아치들의 놀이터였을 것이다. 강 건너에서 배를 타고 만하루로 오르는 멋도 누릴 만했을 것이다. 전쟁 중에도 여인을 끼고 술을 마신 것이 옛 사람이 아닌가? 그래야 호걸이라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하루 바로 앞이 성내 사찰인 영은사이다. 스님도 없는 절집을 고요하다. 마당 끝에 은행나무가 땅바닥에 은행을 수북하게 쏟아 놓았다. 부처님께 공양치고는 냄새가 지독하다. 공북루 앞에는 지표조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천오백년 전 삶의 흔적이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공산성 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곰나루에서는 강물도 멈추었다 흐르는가. 낡은 철다리 아래 강물이 머뭇거린다. 백제 유민들의 여망이런가, 통한이런가. 잔잔한 수면을 저녁노을이 핏빛으로 물들였다. 세월 지나면 한도 아름다움으로 맺히는가 보다. 물에 잠긴 산과 사이사이 고층 아파트가 진홍대단에 놓은 자수처럼 조화롭다.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얼 바라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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