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충북작가회의 회장

지난 주말 고향으로 벌초를 다녀왔다. 여든이 훨씬 넘어 아흔 줄에 들어선 아버지께서는 벌써부터 재촉을 하셨다. 더구나 올해는 모든 일을 앞장서던 큰아들이 멀리 떠나있으니 더더욱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매년 이맘때쯤이 되면 늘 같은 고민이 반복된다.

추석이 다가오면 벌초할 일이 걱정이었다. 지금이야 예초기가 있어 삭발하듯 순식간에 밀어버리니 편해졌는데도 벌초를 가자고 하면 없던 약속도 만드니 연장 문제가 아니었다. 모처럼 휴일에 뒹굴뒹굴 쉬고 싶은데 일을 하려니 쉽사리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사촌들에게 단체 톡을 날렸다.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참석하라고 협박을 했다. 모든 준비를 다해놓고 몸만 가라고 하는데 그것도 못 가냐며 후손된 도리와 염치를 들먹거렸다. 드디어 약속한 날 새벽, 본가에 모두 모여 고향으로 출발했다. 언제나 고향 가는 길은 편안하다. 고향이 가까워지니 산조차 정겹다. 두 시간 남짓 걸려 고향에 도착했다. 어려서 떠나온 고향이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고향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푸근하다. 형이라는 유세로 갑질을 떨며 사촌동생들에게 짐을 지우고 산소를 향해 오른다. 오늘 벌초를 할 분은 증조할아버지 내외분의 뫼 두 장이다. 이제는 사람들 발길이 끊기고 나무와 풀이 뒤엉켜 코앞에서도 길을 잃을 지경이 됐다.

생전에 할아버지께서는 ‘나 죽으면 산소도 잃어버린다’며 증조부 산소가 가까워지면 우리를 앞장세웠다. 그러나 사발을 엎어놓은 듯 다닥다닥 붙어 그게 그거 같은 봉분들 중에서 증조부 뫼를 찾는 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우리를 뒤에서 보시며 할아버지는 혀를 차셨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단번에 뫼를 찾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보시면 한심하다며 또 혀를 차셨을 것이다. 우리는 우거진 수풀 핑계를 대며 한참만에야 겨우 증조부 뫼를 찾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여러 이유를 들어 아버지께 증조부 내외분을 이장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잘 계시는 것을 왜 건드려 동티를 일구려 하느냐’며 극구 반대하셨다.

숲 속 여기저기서 기계소리가 요란하다. 패륜이 난무하는 시절에 효자들의 마음이 되살아난 것 같아 귀청을 찢는 소리도 전혀 시끄럽지 않다. 우리도 기계를 돌렸다.

증조할아버지 뫼 양 옆으로는 나란히 다섯 분이 계신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옆의 묘가 묵기 시작했다. 봉분에는 풀이 수북하고 나무가 자라났다. 서너 해가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정이 있어 자손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옆은 묵묘가 되었는데 증조부만 깎고 내려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증조부와 함께 계시니 언제까지나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증조부께서 사신 이승에서의 삶보다 더 긴 세월을 이웃하며 사셨으니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자손들보다 훨씬 더 가까운 분들이 그분들일 것 같았다. 산 자나 망자나 가까이 있는 오래 사귀어온 이웃이 더 좋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그분들도 깎아드리기 시작했다. 벌초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지들 편하자고 이장하자’했던 생각이 떠올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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