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왕궁지에 올랐다. 금서루(錦西樓)에서 남쪽으로 우거진 숲 사이로 성벽 길을 걸으면 진남루로 가는 내리막길 못미처 왼쪽으로 너른 빈터가 보인다. 몇 걸음만 걸으며 살펴도 이곳이 곧 공산성의 요지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왕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용수 저장하는 연못, 지하 저장시설인 목곽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삼족토기 같은 백제시대 유물이 나와서 왕궁의 가능성을 더한다. 공산성 정문인 진남루(鎭南樓)가 바로 아래인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건물지에 남은 초석이 24칸, 10칸으로 비교적 큰 규모임을 말해준다. 밑에 돌을 박고 초석을 놓는 적심석 기초를 사용한 것도 웅진 천도 이후의 건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출토된 수막새에 연화문이 8엽, 10엽인 것은 백제 초기의 전형적이 형식이라고 한다. 평기와에는 웅천(熊川), 관(官)이라는 도장을 찍은 명문이 있는 것도 건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너른 건물지 북으로 장대처럼 높은 곳에 쌍수정(雙樹亭)이 있다.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에 파천했을때, 말을 타고 이곳에 올라 북쪽으로 대궐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환란이 평정되고 그 기쁨으로 나무에 금대를 두르고 벼슬을 내려 쌍수정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통정대부 벼슬을 받은 나무는 이미 죽고 없으나 몇 그루의 고목이 정자를 호위하고 있다. 나무가 벼슬을 했다니 속리산 정이품송이나 보은 서원리 정부인(貞夫人) 소나무가 생각난다. 나라가 환란에 들면 임금이 마음을 의탁하는 곳은 대신이나 백성만은 아닌가 보다.

쌍수정은 인절미의 유래담도 지니고 있다. 인조가 이곳에 머무를 때 공주의 임(任)씨 성을 가진 한 농부가 찹쌀을 밥처럼 쪄 떡메로 쳐서 콩고물을 묻혀 진상하였다. 떡을 맛있게 먹고 임씨 성을 가진 이가 가져온 맛있는 떡이라는 뜻으로 ‘임절미’라 한 것이 인절미의 유래가 되었다. 백성이 임금을 위하는 마음도 도탑고, 진상하는 마음을 소중하게 받아들인 임금의 사랑도 따뜻하다.

쌍수정에서 내려와 24칸의 주건물지 남쪽에 원뿔을 거꾸로 박아 놓은 것과 같은 연못지가 있다. 연못이라 하기에는 작고 우물이라고 하기에는 커 보인다. 건물 앞에 조경을 목적으로 만들었을 수 있고, 유사시에 용수로 사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밑에서 위로 점점 넓게 안에는 점토를 박고 겉에 돌을 쌓아 사발모양이다. 수백 년 내려오면서 흙에 묻혀버린 것을 1985년 발굴할 때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옛 연못이 오늘은 보물창고가 되었다.

왕궁지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이곳에서 공주의 시가지나 송산리 고분군이 그대로 보인다. 가히 명승이라고 할 만하다. 건물이나 나무는 당시의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출토되는 기와나 토기 같은 유물은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것이다. 그들의 눈물도 영화도 다 거기에 담겼을 것을 생각하니 돌 하나 흙 한 줌이 새롭다. 이 거대한 산성은 백성의 눈물과 피로 쌓은 것이다. 왕은 백성의 한을 쌓아 자신의 권력을 방어한 것이다. 인간은 왜 권력이란 걸 만들어 놓고 주인인 백성에게 피를 강요할까. 이념으로 갈등하는 것이나 권력으로 투쟁하는 것도 다 어리석음에서 나온 짓이다. 오늘은 왠지 문화에 대한 자부심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숙연해진다. 펄럭이는 남궁주작(南宮朱雀) 깃발을 바라보다가 옛사람의 발길을 따라 진남루로 내려간다. 문득 사드(THAAD) 배치로 갈등하는 정국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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