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숙 수필가

“엄마, 무얼 그렇게 하세요? 그만하고 얼른 이리 와서 앉으세요.”

엄마는 못 들은 척하며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가까이 가 보니 스티로폼 상자에 가득 담긴 멍게를 다듬고 계셨다. 놀라서 도우려 하자 굳이 당신 혼자 하겠다며 고집을 부리셨다. 생전 그 생물은 사 오는 걸 보지 못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너 많이 먹어라.”

동생들 눈치 보며 엄마는 멍게가 담긴 접시를 슬쩍 내 앞으로 밀어주신다. 은근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젓가락을 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멍게 좋아하지?”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아셔?”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시집 식구들 모두 모여 멍게를 먹는데, 열심히 다듬어서 내놓고 가보니 글쎄 네 몫은 거의 남아있지 않더라고. 먹고 싶은 걸 참느라 참 속상했다고 그러더라. 시집살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했지만 마음이 내내 안 좋았어. 오늘 아침에 너 온다길래 부리나케 시장에 갔더니 마침 멍게가 한창인 거야. 냉큼 사 왔지. 이제라도 실컷 먹어라.”

순간 목이 꽉 메어왔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내가 언제 그랬더라! 잊고 있었던 까마득한 옛일이었다.

달랑 전화 한 통 하고 엄마 냄새 맡고 싶어 달려온 길이었다.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사는 나는 늘 친정이 그립다. 외딴 섬에 나만 뚝 떨어져 있는 느낌이랄까. 특히 몸이 아플 때는 엄마가 해 주는 밥 한술 뚝딱 먹고, 한숨 푹 자고 나면 다 나을 것만 같았다. 그 마음을 엄마는 예감처럼 알고 계셨던 것이다.

같이 밥을 먹던 두 여동생이 숟가락질을 멈추고 먹먹한 눈으로 나와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구, 엄마두 참 극성이셔! 이 멍게, 언니 혼자 다 먹어야겠다. 오늘은 언니한테 다 양보한다. 엄마는 유별나게 언니만 좋아해!”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 수습에 나선 동생들이 고마웠다.

여동생 둘은 엄마가 계신 아파트의 같은 동과 옆 동에 산다. 내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열 일 제치고 반찬 한 가지씩 들고 달려온 것이다. 그리움이 간절하면 텔레파시가 통한다고 했던가. 그날 우리 세 모녀는 모처럼 그득한 밥상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막내딸 시집 보내느니 내가 같이 간다.’ 하시곤 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엄마는 막내네 곁에 사신다. 동생의 살림살이를 알뜰하게 챙겨주면서도 “그런데도 늘 마음이 안 놓여!” 하신다.

한 번은 우리 집에 오셔서 구석 구석 살펴보더니 너는 프라이팬이 두 개나 되니 하나는 당신 달라고 하셨다. 영문도 모르고 드렸더니 막내딸 갖다 준단다.

“그 애는 이런 거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잘 몰라” 엉뚱한 엄마의 말에 한바탕 웃은 일이 있었다.

막내 바라기는 언제쯤 멈출까? 엄마는 평생 새끼손가락만 아파하는 줄 알았다.

새삼, 생전의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네 엄마 외롭게 하지 마라. 엄마 참 고생 많이 했다! 내가 먼저 가더라도 네가 곁에서 잘 보살펴 주었으면 좋겠구나!”

아버지는 병이 깊어지자 내 손을 잡고 절절한 눈빛을 보내셨다.

“아부지, 걱정 마셔요. 제가 잘할게요. 마음 편히 잡수시고 툴툴 털고 얼른 일어나세요.” 나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던 아버지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30대가 채 여물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인 줄 미처 몰랐다.

졸지에 나는 어설픈 보호자가 되었다.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아버지는 이럴 땐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돌아다보곤 했다. 든든했던 아버지의 울타리가 그리워 허구한 날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나는 근 이십여 년을 엄마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늘 마음만 앞서고 허둥대기 일쑤였다. 그나마도 엄마가 동생들 곁으로 이사 한 후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소홀해지고 있었다. 자주 찾아 뵈어야지 하는 마음은 굴뚝 같은데, 그 마음을 몸으로 살지 못하고 있어 자책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여전히 엄마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연약한 딸이었음을 깨달았다. 엄마의 기억 속의 나는 언제나 20대 초반, 제대로 가르칠 새도 없이 시집가 버린 아픈 손가락이었다.

친정에 가면 엄마는 내게 일도 시키지 않는다. 동생들에게 하듯 무엇을 해오란 말도 하지 않는다. 나만 보면 늘 뭐가 불안한지 “너 이제 살림은 좀 하니?” 하고 버릇처럼 물으신다. 내가 이미 능숙한 주부 9단이 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시집살이에 지쳐 엄마에게 하소연하고 가면 몇 날 며칠을 잠 못 이뤘다는 말씀이 새삼 가슴에 와 박혔다. 치매를 앓으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마땅히 갈 곳이 없을 때도 엄마를 찾았었다. 엄마는 나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엄마 걱정 말고 너나 편하게 잘 살아. 네가 그랬잖아. 엄마가 아프면 우리 집은 그 날부터 비상이라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잘 챙길게. 나 혼자서도 온종일 이것 저것 할 일이 많아. 재미나게 잘 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어. 그게 나도 편해.”

엄마는 짐짓 씩씩한 말투로 내 등을 다독이신다. 맏딸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팔순 노모의 안간힘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후루룩 마시듯 멍게를 먹는 나를 보느라 그날 엄마는 밥도 제대로 드시지 못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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