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 국립청주박물관 자언봉사회

어릴 적 살던 집 마당 한 켠에는 화초가 다소 곳이 서 있었다.

수탉 벼슬같은 맨드라미, 노란 붓꽃, 채송화 등 많은 꽃이 자태를 봄냈다. 그 가운데 모습이 전혀 다르데도 칸나와 파초를 구별,  못한 기억이 있다.

맑게 갠 날, 갑자기 하늘에서 후둑후둑 빗방울이라도 떨어질라치면 가장 먼저 알려주던 것은 파초였다.

자고나면 키가 한 뼘 씩은 큰 듯 어른 키보다 더 자라 있었다. 밑 부분은 굵은 줄기에 잎 끝은 사방으로 퍼져 큰 우산처럼 보였다.

관상용으로 정원에 심기도 하고 약재로도 쓰였던 파초가 지금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기후와 토양이 달라져서 일까. 유년의 뜰에서 서있던 파초가 이후에 알고 보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 선비들이 마음 속에 일찌감치 자리잡고 있었다.

문인화를 그렸던 화가들이 즐겨 소재로 삼을 만큼 조선시대 문예부흥기라 불리울 만한 시기는 영조 정조 무렵였다.

정조 임금은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나 주로 사군자를 그렸다. 그리고 수묵으로 그린 파초도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괴석과 파초를 비교적 간결하게 그렸고, 먹을 옅게 또는 짙게 농담을 나타내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이다. 책 속에 들어있는 작품을 한참 들여다 보면 ‘소쇄’ 라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다.

왜 이렇게 파초도를 그리길 좋아했을까.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인 ‘회소’라는 사람은 가난하였다. 종이를 살 수 없어 뜰에 파초를 심어놓고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파초의 잎을 따서 그 위에 시를 적었다고 한다.

어려운 생활에도 학문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꿋꿋이 매진하는 선비정신, 그 고결함을 상징하였다.

더운 여름이면 불볕더위도 피할 겸 얼굴도 가릴 겸 파초 잎을 구부려 부채 삼아 부치기도 하고 실제 부채를 파초모양으로 만들어 지니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시 의정을 펴는 양반들이 바깥 출입을 할 때 이 파초선은 하절 필수품이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짜임새가 어근버근 돌아가는 듯 하다.

어려운 경제, 요즘 한창 떠들썩한 불량만두사건이 일어나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기온은 벌써 한 여름, 답답한 가승을 식혀줄 파초선 하나 갖고 싶다.

우리 주변에 울화를 시원스레 날려보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어느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정도를 걸었던 그 정신이 그리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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