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연구원 연구위원

몇 년 전에 ‘대화학교’에서 말하는 법 즉, 대화기법을 배운 적이 있다. 태어나서 엄마, 아빠를 내뱉기 시작한 이후로 우리는 줄곧 말을 하면서 살아왔다. 하루라도 말을 하지 않은 날이 없는데 새삼 무슨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 라고 약간의 불평과 호기심을 가졌다. 첫 강의에서 나온 내용이 ‘모든 대화는 위험을 수반한다’라는 것이다. 위험을 수반한다? 대화를 하는데 왜 위험이 따르지? 결론적으로 대화를 제대로 하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예전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유럽 출장을 갈 때였다. 10시간이 넘는 오랜 시간을 좁은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가려니 막막하기도 하고 옆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을까 궁금 반 걱정 반 이었다. 짐을 올려놓고 앉아 있는데 어느 노신사 부부가 옆 자리에 앉았다. 고집이 있어 보이는 70대 초반의 남성이라 선뜻 말을 붙이기가 두려웠다. 비행기가 출발 후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어디까지 가는지, 무슨 일로 가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인 필자는 마음만 굴뚝같이 먹을 뿐이었다.

혹시 질문을 했는데 무뚝뚝하게 대답하면 어쩌지? 아예 대답을 안 하면 어쩌지? 그 다음 말은 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노신사가 먼저 ‘무슨 일로 가시나요?’라고 질문을 해왔고 나는 업무로 출장 간다고 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순간 부끄러웠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건네지 못한 내 자신에게 조금 불만스러운 감정이 생겼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잠시 눈을 붙인 1시간 정도를 빼고 계속되었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그 노신사가 주소를 물어왔다. 본인의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을 보내주겠노라고. 그리고 몇 주 후에 정말 아이들을 위한 자연도감 한 상자가 도착했다.

대화학교 교재에서도 필자와 비슷한 예문이 나온다. 비행기에서 나란히 앉게 된 두 사람을 가정하였는데, 용기를 내어 보낸 메시지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이 ‘용납’일 수도 있고, ‘거부’일 수도 있고, 또 상대방이 메시지 자체를 무시함으로 ‘실격’되어 버릴 수도 있기에, 말을 건네는 사람은 위험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을 동반하지 않으려고 많은 사람들은 서로 알기를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고 한다. 위험을 동반하는 대화는 친근해질 수 있지만 위험을 동반하지 않는 대화는 그 어떤 관계도 발전시킬 수 없다고 한다.

그 대화학교 이후 필자의 대화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위험을 동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후회하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말을 해서 후회하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결과가 훨씬 많았다.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 감정이 섞여 있을 때 발생했다. 감정이 섞이다 보니 사실에 대한 초점이 흐려지고 감정이 섞인 사족이 들어가게 되고 그것이 듣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 내어 말을 건넨 것은 잘 했지만 표현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조언을 듣곤 했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분리하여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하느냐?’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하니 당초 목적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라고 생각과 감정을 분리해 표현했더라면 안 좋은 결과는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특히 부부 사이에서는 이러한 감정의 분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생각과 감정의 분리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그것은 배우긴 했으나 실천과 끊임없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다. 50년 가까이 사용해온 말이 아직도 제대로가 아니다. 필자가 70대 초반이 되어, 유럽 출장길에 만났던 그 노신사처럼 낯선 이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8시간을 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더 배우고 실천을 거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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