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숙 수필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

아버지는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구성지게 꺾는 부분을 넘기고 있다. 살짝 비켜 잡은 마이크는 마치 관객을 의식한 프로가수의 폼 같았다. 탬버린으로 신나게 장단을 맞추던 내 볼 위로 주책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말이 없으신 아버지는 약주 한 잔을 드셔야만 입을 떼셨다. 엄마가 갓 시집왔을 때 좀체 입을 열질 않는 아버지를 보며 혹여 벙어리한테 시집을 온 게 아닌가 걱정을 했단다.

어쩌다 친구 분들이랑 약주 한 잔 드시고 오면 이런저런 농담을 하며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좋았다. 근엄 하기만한 모습 보다 훨씬 다정하고 정스러워 좋았다. 그런 시간은 아버지에게 어리광도 피우고 불평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자식을 낳지 못한 할아버지는 논 여덟 마지기를 주고 6촌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한창 어리광도 부리고 말썽도 피울 6살의 나이에 아버지는 새로운 부모를 받아들여야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엄격하셨다고 했다. 혹여 객지 물을 먹으면 부모 곁을 떠날까봐 그랬던지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마을 어귀를 나설 때 아버지는 혼자 지게를 지고 논으로 발길을 돌리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평생 부모를 모시고 고향을 지키며 재산도 꽤 많이 불렸다.

난 농부인 아버지가 싫었다. 늘 검게 그을린 얼굴, 후질근한 행색, 아무리 차려입어도 요즘말로 뽀대가 나지 않았다. 중 고등학교 입학식 졸업식 사진에 언제나 초라한 모습의 아버지가 서 계셨다.

철없던 나는 시내 사는 친구들 아버지처럼 멋진 양복에 넥타이를 맨 그런 아버지였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농부 아버지 덕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편안한 유년을 보내고 지금껏 편안히 살고 있는지를 바보같이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신다. 명절 때 동네서 열리는 콩쿨대회에는 단골 수상자였다. 갖가지 살림도구들을 상품으로 타오곤 했다. 해마다 추석때면, 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콩쿨대회에서 아버지가 노래를 부를 때면 동네사람들은 앵콜을 외치곤 했다. 그런 날은 얼큰히 취해 들어오셔서 콧노래를 흥얼거리셨다.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고 결혼을 하며 아버지의 노래는 내 귓전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잊혀져갔다.

어릴 적 내가 듣던 아버지의 노래는 유정천리, 울고 넘는 박달재 이런 것들이었다. 가사의 의미는 몰랐지만 뭔가 아버지의 표정에서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내가 어른이 되고 아버지는 노인이 되었다. 어른이 된 내게 비친 노인 아버지는 한 시대를 그저 평탄히 살아낸 적당한 행복과 적당한 부와 그리고 적당히 노년을 즐기는 그런 모습이었다.

오늘 아버지가 노래를 부른다.

40여년 전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심는 두매 산골 내 고향에…’ 를 불렀던 아버지는 오늘,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라고 노래한다.

80을 넘긴 초로의 아버지가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는 무엇일까?

아버지의 노래에 나는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슬프게 들려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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