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충북작가회의 회장

연일 계속되는 후텁지근한 열대야로 깊은 잠을 잘 수 없다. 묵직해진 머리를 식히려고 새벽부터 무심천으로 자전거를 타러갔다. 하상의 자전거 도로도 그다지 시원함을 느낄 수 없다. 하기야 사방이 달아있는데 무심천만 시원할 리 없다. 그래도 자전거를 타고 달리니 집보다는 낫다.

더위 때문인지 새벽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밤잠을 설치고 몸은 천근만근인데 새벽부터 운동할 마음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참으로 사람 마음은 간사하다. 사람이 많아도 성가셔서 운동할 마음이 생기지 않지만 너무 한산해도 동하지 않는다.

무심천 상류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다가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어떤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차림새를 보니 운동을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두 분이 어디로 출타하는 중인데 차도 옆 인도보다는 하상도로가 조금은 시원해서 내려온 것 같았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손에는 늙은 호박만한 보퉁이가 들려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할머니는 뭐가 불편한 듯 자꾸만 지나치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내가 노부부 옆을 지나치는 순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가 들구 갈까유?”

“냅둬!”

나는 그제서 할머니가 왜 주변 눈치를 살피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요즘 사람들의 사랑표현 방식이 너무 뜨겁다. 요즘 날씨 같다. 특히 젊은이들의 사랑표현을 보면 내가 딴 세상에라도 온 듯 착각이 들 정도다. 그 표현방식에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애써 눈길을 돌리고 싶을 때가 많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그 정도는 극에 달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것이 시대를, 문화를 선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텔레비전을 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시청률을 높이는 것이 급하다 해도 자신이 쓰는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미칠 영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도리 아닐까.

얼마 전 무심천 다리 밑 쉼터에서 스무살은 됨직한 젊은 남녀를 보았다. 저녁 무렵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방이 환한 대낮이었다. 그런데 두 남녀는 길가 돌 의자에 앉아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남자의 무릎에 올라앉아 서로 끌어안은 상태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그 둘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눈총을 주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어디에서 많이 본 그림이다. 그런 광경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본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만의 사랑을 좀 더 은근하게 표현했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들고 가는 보퉁이가 자꾸 신경에 쓰였다. 할머니 시절에는 바깥양반이 그런 것을 들고 바깥출입을 한다는 것은 큰 흉 거리였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었다. 할아버지 역시 보퉁이를 달라는 할머니의 마음을 읽고 퉁명스러운 말 한 마디로 할머니를 아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적당할 때 노부부처럼 오랜 시간 서로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뜨거우면 곧 식기 마련이다.

멀어져가는 노부부의 등을 바라보며 그 은근함에 잠시 무더위를 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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