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밧줄을 잡고 오르는 순간 시야가 탁 터진다.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다. 합강이다. 머리로만 그리던 금강과 미호천의 합수머리를 한눈에 내려다보기는 처음이다. 대청호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오가리와 신탄진을 지나 이곳 합강리에 이른다. 미호천은 음성 부용산에서 발원해 진천 백곡천, 증평 보강천, 청주 무심천을 끌어안고 200여리를 달려 합강리에 이르러 금강에 어우러진다. 전월산에서 내려다보니 그 모습이 장엄하다.

군산에서 소금이나 어물을 실은 배가 백마강을 거슬러 곰나루를 지나 이곳에서 짐을 풀면 서울도 가고 보은도 간다. 아니 보은을 지나 경상도까지 이른다. 물자뿐만 아니라 권력 확장의 야망도 칼이나 화살을 싣고 이 물을 타고 올라올 것이다. 전월산은 그래서 ‘산’이다. 낮지만 어미산인 원수봉(254m)은 그냥 ‘봉’인데 아들격인 전월산은 ‘산'이다. 실제로는 원수봉산성이 있는 성재산이 어미산이라 할 수 있다. 더 높은 원수봉은 그냥 보루이고 금강에 바짝 붙어 경계를 살피던 전월산도 보루를 넘어 산의 지위를 얻었다. 과연 물에 비친 달도 이 산을 한 바퀴 돌아갈 만하지 않은가.

정상 푯말 바로 앞에 상여바위가 있다. 여말 선초를 살았던 임난수 장군이 고려를 그리워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상려바위'였다. 전월산에서 양화리 쪽으로 내려가면 은행나무 곁에 임난수 장군의 숭모각이 있다. 가버린 역사를 그리워하는 것은 내가 백제를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그는 가버린 역사가 아니라 가버린 권력을 그리워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조'라고 말한다. 권력 계승의 정통성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가버린 권력이 그리워 새로운 권력에 반기만 든다면 역사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기는 최근에는 정통성 있는 새로운 권력에도 끝끝내 반기를 드는 삐뚤어진 지조도 있다.

바로 앞에 ‘용샘’이라는 샘이 있는데 전하는 이야기가 자못 인간적이다. 합강의 용이 전월산 용샘을 통해 승천하고자 하다가 임신부가 봐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지키지 못해 버드나무가 됐다는 비극적 이야기이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바로 비가 내렸다니 신령스러운 샘으로 여긴 것 같다. 샘이 깊고 물이 차다. 실용적으로 생각하면 원수봉산성에서 이곳에 파견 나온 군사들의 식용수가 아니었을까 한다. 수량이 많아 마실 물도 되고 밥도 지었을 것이다. 군사 주둔의 흔적이다.

다시 정상으로 올라와 정부종합청사를 바라본다. 예전에는 야망이 권력을 배에 싣고 금강을 따라 올라왔다고 한다면, 이제는 권력이 이렇게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옮겨 온다. 전월산의 용샘에서 승천을 꿈꾸다 이무기로 전락했다던 용은 오늘 저기 양화리 건너 새로 마련된 호수를 지나 용을 닮은 정부청사가 되어 승천을 꿈꾸며 꿈틀대고 있다.

용의 모습을 본떠서 설계했다는 종합청사는 대한민국을 세계의 용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왕에 세거지인 부안임씨 비롯한 원주민들을 내보내고 서울을 이곳으로 옮겼으니, 저기 모여 나랏일을 보는 벼슬아치들은 반곡마을을 흘낏거리거나 노류장화의 유혹에 넘어가서 이무기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서울에 내준 이들을 위로하는 지름길이고 겨레의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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