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충북작가회의 회장

아내가 외출을 한 사이 아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휴대폰 번호를 묻는 아내의 친구에게 전화를 끊고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는 아내의 번호를 찾기 위해서였다. 한참 만에 전화를 걸어 아내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그 다음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어째 당신은 마누라 번호도 못 외우냐”며 지청구를 주었다. 잘못한 것도 없지만, 잘한 것도 없는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그러더니 아내의 친구가 ‘집에서 어떻게 대우를 받고 살기에 남편이 네 전화번호도 모르냐’며 간 큰 남편이라고 빈정대더란다. 그래서 기분이 상했단다. 여성들의 사고가 참으로 가관이다. 그깟 번호 외우지 못할 수도 있지, 그까짓 것 외우지 못했다고 대우, 간 얘기까지 들먹이는가. 남편이 하는 모든 것이 마뜩찮다.

아침에 일어나 눈떴다고 얻어맞은 남편 얘기가 나왔으니, 내가 하려는 얘기는 이젠 고전 중에도 고전이 되었겠다. 언젠가 사석에서 들은 ‘마나님 동창회’이야기다.

어떤 능력 있는 남편이 부인께서 여고동창회에 가신다기에 거금을 들여 최고급 옷과 핸드백에 보석까지 온몸에 치렁치렁 치장을 해서 내보냈다. 그리고는 칭찬을 받기위해 이제나저제나 마나님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나님께서 그 비싼 핸드백과 옷을 개 껍데기 벗듯 벗어 방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당연히 칭찬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던 남편이 황당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 마나님께서 ‘다 죽었는데, 나만 살아있다’고 하더란다.

아무리 우스갯소리라고 해도 짜증이 난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그런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의 저의가 정말 궁금하다. 살아있는 것이 죄가 될 정도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인간이 생존하려면 반드시 먹어야 할 한 끼 식사조차도 눈치를 봐야하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구차스럽고 자존심 상한다. 부아 나는 대로만 한다면 당장 곡기를 끊고 싶다. 수컷들의 수난시대다.

세태가 이리도 변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주된 이유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점점 본능적으로 변해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적당하면 만족해야 한다. 그럼에도 족함을 모르고 끝없이 타자를 동경하는데서 생긴 결과다. 상대적 빈곤, 상대적 박탈감이 본능을 키우는 것이다. 보여주기, 과시하기, 군림하기가 그렇게도 하고 싶은가. 천박한 본능이다. 동물은 자신들의 종족을 유지하기위해 힘센 놈이 약한 놈을 지배한다. 제일 강한 놈이 모든 암컷들을 소유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유전자를 보존해나간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자만 올려다보고 부러워하니 동물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그야말로 동물의 세계다.

세상에 잘난 최고만 바라다보니 어지간한 남편 놈은 눈에 차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두통거리일 뿐이다. 능력도 없는 나는 마누라님 휴대전화 번호라도 외워놓았다가 누가 물으면 제깍제깍 대답해줘야 될 텐데 머리가 나빠 그마저 어려우니 도태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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