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기원전 209년, 진(秦)나라 시황제가 죽고 그의 막내아들 호해가 2세 황제에 올랐다. 법은 엄하고 부역과 조세는 가중하여 백성들은 굶주림과 핍박에 시달리는 시절이었다. 이 무렵 하남성 어느 시골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진승이라는 청년은 일대에서 함께 징용된 청년 1천여명과 함께 북쪽 변경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마침 장마철이라 강물이 범람하여 도무지 길을 나설 수 없었다.

그 당시 진나라 법에는 징용되어 가는 자는 기일까지 당도하지 못하면 이유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하게 되어있었다. 진승 일행은 아무리 서둘러 가도 기일 안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선택은 하나 밖에 없었다. 진승은 비밀리에 징용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래저래 죽은 몸이오. 우리도 같은 사람인데, 왜 우리라고 규정된 날에 당도하지 못하면 벌레같이 죽어야 한단 말이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진나라를 쳐부수는 것뿐이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디 타고났겠습니까? 우리도 궐기하여 정권을 휘어잡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행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마침내 봉기를 일으켰다. 관원들을 처지하고 진승을 우두머리로 삼아 진나라에 대항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반란군이었다. 반란군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 그 세력이 점차 커졌다. 7개의 현을 단숨에 수중에 넣자. 한순간 병사의 수가 50만을 넘었다. 진승은 회양 땅에 이르러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장초(長楚)라고 명하였다. 이어 30만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의 도읍 함양으로 쳐들어갔다.

진나라 조정은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이었다. 황급히 장군 장한을 토벌군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장한은 즉시 군대를 편성하여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먼저 첩자를 보내 반란군 동태 파악에 나섰다. 그런데 수집된 정보가 아주 의외였다. 반란군 내부는 알력 다툼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농민 반란이었지만 지식인과 관리 출신들이 권력을 잡아 여전히 농민은 푸대접 받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진승을 왕으로 내세우면서 실권은 자신들이 쥐고 흔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반란군 농민들은 지휘계층을 신뢰하지 않았고 진승 역시 배신자로 여겼다.

이렇게 반란군의 정황을 소상히 알게 된 장한은 병사 수백 명을 반군에 투입시켜 농민과 지식인 간의 반목을 부채질하였다. 결국 반란군은 내분의 격화로 혼란에 빠지고 규율도 없고 체계도 없는 그야말로 불난 집과 다를 바 없었다. 장한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철저히 훈련된 관군을 총동원하여 공격에 나서자 반란군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갔다. 진승은 도주하던 중 자신의 수레를 끌던 마부의 손에 살해되었다. 반란군은 너무도 어이없이 붕괴되고 만 것이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세가(史記世家)’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진화타겁이란 남의 집에 불이 났을 때 그 집 식구들이 모두 정신없는 틈을 타서 몰래 물건을 훔친다는 뜻이다. 작은 의미로는 남의 위기를 틈타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말하고, 큰 의미로는 적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궤멸시키는 병법(兵法)을 말한다. 싸움은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무작정 무력으로 대항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적의 급소를 아는 자가 승리하기 마련이다. 인생을 늘 패배하고 사는 자라면 한번 새겨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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