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철 수필가

휴대전화에 낯선 전화번호가 뜨면 잘 받지 않는 편이다. 앉아서 노는 사람 같으면 일일이 받아주고 들어줄 아량이 있을지 모르지만, 경운기 소리에 전화벨 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나같이 농사일에 바쁜 사람은 그럴 시간도 없다.

목이 말라 물을 먹기 위해 잠시 쉬는 시간에 들여다본 전화기에는 ‘캐나다’라고 찍힌 글씨 밑에 모르는 전화번호가 세 번이나 통화를 시도한 흔적이 보였다. 캐나다?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조금 전 그 전화번호였다.

“아, 여보세요”

“노식이지? 나 기철이야”

“뭐! 기철이?” “그래. 너희 옆집에 살던, 이제 기억나냐?” “이게 얼마만이야? 그래 어디야?”

기철이와 나는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죽마고우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기철이는 서울로 올라가 평화시장 어느 옷가게에 취직했지만,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몇 마지기 되지 않는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명절 때마다 내려오는 기철이의 모습은 의젓했다. 우리 시골 친구들하고는 때깔이 완전히 달랐다. 나도 기철이처럼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병약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기철이는 조금씩 성장하는가 싶더니 차츰 서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멋있게 양복을 빼입고 진한 선글라스를 쓰고 내려오는 때도 있고 좀 지나자 자가용까지 타고 나타났다. 홀어머니와 여동생도 그 무렵 서울로 데려가고서는 고향에 발걸음이 뜸해졌다.

기철이 아버지 산소가 이곳에 있어서 내가 몇 년간은 벌초를 해주었다. 언젠가부터 벌초 대행업체에 맡기는 바람에 수고를 덜게 되긴 했지만 나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는 몹시 서운했다. 그 후 기철이는 캐나다에 이민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30여년이다.

“내일 서울 가려고, 며칠 있다가 고향 친구들도 볼 겸 내려가려는데 요즘 많이 바쁘지?”

“우리가 초등학교 졸업한지 40년이 넘었지? 그래 우리 기수들 모임은 잘 되는 거야?”

“웬걸, 지금 나오는 친구는 열 명도 안 돼”

“회비는 얼마씩 내는 거야?”

“두 달에 2만원, 그러니까 1년에 12만원이야” “시작을 언제 했는지 몰라도 그러면 많이 적립됐겠네?” “시작한 지는 한 30년 됐을 거야. 모교에 큰일 있으면 찬조금 내고, 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 퇴직하실 때 행운의 열쇠 해드렸어. 그리고 해마다 동문 체육대회 하면 기금 내고, 가끔 여행도 다니고, 지금 몇 푼이나 남아있나 모르겠네”

“그랬구나. 나도 알았으면 회비를 냈을 텐데”

“연락할 방법이 있어야지”

“내가 너무 무심했어. 돈 버는 일에만 악착같이 매달렸지 집안이나 친구들도 모르고 지내온 세월이 원망스러워. 이제라도 좀 천천히 옛날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아.”

“그래, 이제 우리 자주 만나자.”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도 마음은 늘 고향 땅을 헤매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뿐인 아들은 일찍이 서울로 보내 공부를 시켰는데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됐고 마침 보름 후에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 결혼식에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향 친구들 주소를 묻는데 가르쳐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정기모임에 나온 친구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뜨악했다.

“야! 기철이가 우리 동창 맞아? 아들 장가보낸다고 청첩장 돌리면 달려가야 하는 거야?”

“큰일도 품앗이야. 여기 있는 친구들 누구 하나 기철이 주소 알고 있었던 사람 있어?”

내 입장이 묘했다. 주소를 내가 알려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철이와 제일 친하게 지낸 나 역시 우리 집 큰일에 기철이가 다녀간 적은 없다.

“자! 자! 그럴 게 아니라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가지 않으면 되는 거지. 공연히 옛날 친구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 서울 갈 사람은 나에게 연락해”

기철이 아들 혼례식 날 아침까지도 연락해오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나 혼자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결혼식장은 남산에 있는 무슨 호텔이었는데 너무 조용했다. 신붓집 하객도 별로 보이지 않았고 신랑 집 하객은 친척 몇 사람 외엔 없었다. 일부러 초청하지 않은 듯했다. 

혼주인 신랑 아버지와 인사를 하고 축의금을 내기 위해 접수 창구로 다가갔으나 접수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축의금이나 화환은 사절합니다’하는 문구의 팻말이 나를 반겼다. 

점심은 뷔페식이었는데 지방에서 먹던 음식 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하얀 모자를 쓴 요리사들이 곳곳에 서 있다가 구워주고 먹기 좋게 썰어주어서 맛도 있고 따뜻해서 좋았다. 옆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오늘 1인당 점심값이 13만원이란다. 입이 딱 벌어졌다.

“미안하다. 친구야. 다른 친구들은 모심기하느라 바빠서 못 올라왔어. 농사짓다 보면 사람 노릇 못할 때가 많아 친구가 이해해.”

“무슨 소리, 이렇게 와 주었잖아. 어지간히 정리되면 한번 내려갈게.”

“그래, 한번 내려와 그래서 술도 한잔하고….”

친구는 옆에 서 있던 검정 양복 입은 젊은이에게 나를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주라고 해서 처음으로 고급 승용차도 타 보았다. 운전기사가 건네주는 승차권과 쇼핑백을 받아들고 고속버스에 올라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집에 와서 쇼핑백을 열어보니 ‘초등학교 동창회비’라고 쓴 봉투가 나왔다. 그 속에는 50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다. 다른 봉투를 열자 항공권과 호텔 숙식권이 들어있다. 하나하나 이름을 쓴, 부부 동반 캐나다 초청장 여덟 매! 이번에는 친구들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나는 다시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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