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세종시 원수봉산성(진의리 산성)은 세종시 연기면 세종리 원수봉 아래 성재산에 있다. 옛 연기군 남면 갈운리이다. 문헌에는 둘레 1천200m, 높이 2.5m, 폭 3.5m 토석혼축 테메식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원수봉산성 답사를 숙제인 듯 짐인 듯 지고 다녔다. 이 지역이 세종특별자치로 다시 태어난 다음에는 도로, 마을, 시냇물, 산의 들머리 모습이 지도와 전혀 달라 찾아내기 어려웠다. 심지어 설화를 담고 있는 마을 이름까지 바뀌었다. 그래도 기어이 가서 봐야 되겠기에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전월산 아래에 있는 고려 말의 임난수 장군의 추모각 부근으로 접근하려 했다. 그러나 잡초만 무성하고 길을 찾을 수 없어 포기했다. 전월산에서 원수봉으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돌아서는 마음이 아쉬웠다.

도담동 덕성서원에 주차하고 둘러보았다. 둘레길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50대 여인에게 원수봉산성을 물으니 원수봉 가는 길은 일러주면서 산성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도 산성을 아는 이는 없었다. 비로소 사는 사람들이 모두 바뀐 사실을 깨달았다. 이정표에도 둘레길 알림판 지도에도 원수봉산성은 없다.

지도에는 ‘성재’에서 동쪽으로 가면 원수봉이고, 서쪽으로 가면 산성이 있는 성재산이라고 했는데, 이정표에는 ‘성재’란 표찰이 없다. 성재라고 생각되는 안부에서부터 오르막길이 가파르다. 원수봉을 먼데서 보면 마치 세워놓은 수숫대처럼 뾰쪽하게 보이던 것을 실감할 만하다.

정상 가까운 길목에 ‘원수산유래비(元帥山由來碑)'란 비석이 보였다. 아마도 대대로 이 땅을 지키고 살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운 비인 듯했다.

원수산은 연기군 남면의 중심부에 있으며 부모산, 형제산이라고도 한다. 원수산이란 이름에도 두 가지 설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반군 합단(哈丹)의 군사가 연기현에 머물며 작폐가 심할 때 원나라 장수 설도간과 고려 군사의 연합군에 의하여 패망하여 죽은 후 이 산을 원수산(元帥山)이라 했다고도 하고, 형제간의 싸움으로 산이 되었다 하여 원수산(怨讐山), 형제봉이라고도 한단다. 남쪽으로 성재산토성, 금강, 전월산이 보이며, 서쪽으로 국사봉, 북쪽으로 당산성이 있으며, 500정보가 넘는 곡창지대가 펼쳐졌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래비문에 성재산토성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헛걸음은 아닌 것 같아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정상은 열 평도 못됐다. 정상 표지석도 없다. 드넓은 세종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공주로 향하는 장군면 일대의 건설 현장도 손에 잡힐 듯했다. 남쪽으로 너른 옥토를 건너 금강이 흐른다. 북동으로 청주의 선도산도 까마득하게 보였다.

원수봉 하나만 점령하면 주변을 다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머지않은 동남쪽 금강 가까운 전월산에 분대급 군사만 파견해도 나루를 드나드는 인력과 물자를 시야에 다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강은 현대의 고속도로라면 여기는 서울 경상도 전라도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을 것이다. 원수봉산성은 이 모든 것을 지키는 요새였다. 아무리 현대라 해도 그런 산성의 역사를 잊고 사는 것은 문제가 크다. 세종시에 동원된 중장비들이 오늘도 역사의 흔적을 땅속에 묻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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