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못나 보인다. 윤기도 없고 매끄럽지도 못하다. 낟알들이 푸릇푸릇한 것이 옹골차게 여물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요즈음은 쌀에도 도정의 정도에 따라 현미, 백미, 9분도, 칠분도 등으로 구분하는가 하면 쌀의 기능에 따라 갖가지 이름이 붙여진다.

이렇게 이름이 많은데 이 쌀은 어느 범주에 들어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지인이 직접 농사지어 자연 건조해 집에서 도정한 것이라며 맛이나 보라고 보내온 쌀이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밥 짓는 내내 맛난 향기가 진동을 하더니 맛 또한 일품이다. 달착지근하면서도 구수한 것이 찬이 없이 맨밥만 먹어도 맛있다.

콩이나 팥 등 두태를 넣으면 오히려 밥맛이 반감 될까봐 염려스러울 정도로 감칠맛이 난다.

유독 밥맛에 민감한 편이다보니 밥이 껄끄러우면 어쩌나, 찰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염려 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무슨 쌀이 이래 식구도 없는데 량은 제법 되고 이를 어쩌지? 하고 마뜩찮아 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기우였다.

맛난 속살을 지니고 내게 와준 그에게 큰 실례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이는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먹어보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판단해 버린 경솔함이 빚어낸 결과다. 쌀을 내게 보내준 지인의 속 깊은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그의 인품으로 보아 시원찮은 것을 보냈을 리 만무함에도 이를 간과하고 것 모습만 보고 섣불리 단정을 내린 탓에 보여 지는 모습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순정한 맛을 지닌 쌀의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음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특권 중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오감(五感)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들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만은 그 중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선 눈으로 보아야 형태를 알 수 있고 다음의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깨달아 제대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삶은 보는 것의 연속이다. 하루의 포문을 여는 순간부터 주변의 사물들을 보고, 수많은 사건들을 보고, 누군가를 보게 된다. 사람살이는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정도다.

자의든 타의든 홍수처럼 밀려오는 눈에 들어오는 것들 속에서 보아야 할 것들과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분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세상은 말한다.

제대로 보고 그에 합당한 처신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속은 보려하지 않고 겉 모습만보고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객관성이 결여된 내 눈의 잣대로 보고 그의 경중을 논하는 바람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누구를 만나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하는 우리네 삶에서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다는 것은 바른 삶을 살아가는 척도가 되는 것일 게다. 만남의 궤적들이 쌓여 인생이 됨이다.

내 삶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숨을 고르고 내 안을 들여다본다.

외모 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편승해 겉모습만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분별력을 잃어버린 채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내게는 아무래도 첫눈에 들어오는 것을 중요시 하는 부분이 많음을 부인 할 수 없는 것 같다.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도 우선 보기 좋아야 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도 첫인상을 중요시 여기는 것만 봐도 그렇다.

‘뚝배기보다 장 맛’ 이라는 말의 뜻을 잘 알면서도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쪽에 비중을 두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심안(心眼)이 열려 있어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진정한 가치와 본질을 발견 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얼마나 세상을 더 살아야, 어떻게 살아야 이에 다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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