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6월의 파란 여름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멀리서 들리던 천둥번개소리가 북한의 대포소리로 알게 된 것은 하루가 지나서였다. 나라 지키던 군인들도 농번기 일손 돕기를 위해 비상경계령도 해제하고, 외출·외박을 했다. 방비가 소홀한 일요일 새벽4시! 38선 전역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일제히 기습남침을 한 것은 북한의 소행이었다.

이렇게 북한은 먹구름 속에 장맛비를 잉태(孕胎)하듯 극비리에 철저한 남침준비를 했다. 부패한 남한 정권은 권력 다툼과 이념 논쟁에 빠져 남침야욕을 알지 못했고, 큰 재앙을 가져올 물난리를 막아낼 수방대책을 소홀히 한 것과 같았다. 불과 두 달 만에 대구 부산만 남기고 전 국토의 90%가 공산 치하가 됐으니 얼마나 국방이 허술했으면 장마에 제방이 문어지듯 했을까. 평화롭게 살던 국민들은 졸지에 참담한 인공시절을 겪어야만 했다.

6·25때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낙동강 방어전 이였다. 한국군은 국토의 8%밖에 남지 않은 땅을 지켜내기 위한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UN군이 참전할 때까지 버티어 내야했다. 인민군은 그 안에 대구부산을 점령하고 말겠다는 야욕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후방에서는 어린 청소년까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이 전쟁터로 내 몰았다. 나이든 사람들은 포탄과 식량을 지고 산속 밤길 수 백리를 끄려갔다 살아 돌아온 사람은 드물었다.

장마가 걷히고 9월이 되자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을 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그렇게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은 문어졌다. 특히 다부 동 전투에서 인민군 3개 사단 병력이 전멸하고, 제공권을 완전 장악한 UN군의 폭격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고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6월 장마에 대구 부산까지 밀리고, 9월 태풍에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전투가 밀물 썰물이 교차하듯 했다. 또 중공군의 개입으로 치열한 전진후퇴를 거듭하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은지금도 끝이 아닌 정지된 휴전상태이다.

장마가 할퀴고 간 강촌은 황폐화 되고 쓸쓸한 들판에는 농작물의 잔해만 남아있다. 이곳저곳 어느 곳을 가보아도 총에 맞아 죽은 시신이 수없이 나돌고 부상당한 다리를 절며 후퇴하는 의용군. 인민군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했다. 왜. 무슨 잘못이 있어 젊은 청년이 이처럼 비참하게 죽어가야 하는가. 통한(痛恨)의 슬픔이 온 민족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한(恨)으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비참한 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6·25때 참전했던 소년병이 팔순을 맞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잘 모르는 전쟁’ ‘잊혀 져가는 전쟁’이라 한다. 한반도의 안보상황은 먹구름이 가시지 않고 있다. 언제 장마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정세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가 어떻게 자유와 민주화를 지켜왔는지, 어떻게 북한의 기습남침을 극복하고 산업화를 이룩했는지를 제대로 똑바로 가르쳐야한다. 국가안보의식을 높이고 나라 지키는 방위력을 크게 증강해 철저한 대비를 하는 것만이 이 땅에 비참한 전쟁을 막는 길이다. 그것은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철저히 하여 장마로 인한 물난리를 막는 일과도 같은 의미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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