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나라의 중심 ‘충주(忠州)’
[김정인 교수의 풍수칼럼]나라의 중심 ‘충주(忠州)’
  • 충청매일
  • 승인 2016.06.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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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대 경영학과

충주는 백제 땅이었으나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유역까지 진출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손자 문자왕이 고구려 남방한계선에 고구려비(碑)를 세운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가야를 통합하고 가야의 귀족을 이주시키고 이곳을 국원소경이라 해 제2의 수도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원성왕 때에는 통일신라의 중앙을 확인하기 위해 남쪽과 북쪽 끝에서 사람을 출발시켜 만나는 한가운데 중앙탑(中央塔)을 설치하고 이곳이 나라의 중심임을 표시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이곳을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자를 합해 충성의 뜻을 담아 충주(忠州)로 개칭했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이 전국을 8도로 나누면서 지역별로 대표되는 도시의 이름 첫 자를 따서 도명을 지었는데 이곳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첫 글자를 따서 충청도라고 했다. 충주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심역할을 해왔고 고비마다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조에는 과거시험을 통해 나라의 인재를 등용했는데 영남 및 호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여러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주를 경유했다. 그 이유는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길은 영주 단양의 죽령(竹嶺), 김천 영동의 추풍령(秋風嶺), 문경 충주의 조령(鳥嶺)이 있었는데 죽령을 넘으면 과거에 미끄러진다는 전설과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조령고개를 많이 이용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대군을 조령에서 막느냐 충주 탄금대에서 막느냐가 검토됐다. 훈련되지 않은 군사와 기마병을 데리고 싸우는데는 평야지대인 충주에서 기마전을 하는 것이 승전할 것이라고 예측해 배수의 진을 치고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8천여명의 군사로 2만5천 대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풍수에서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근본으로 삼고 역배산임수를 가장 불리한 것으로 본다. 충주 땅은 백두대간 월악산을 배산(背山)으로 남한강과 달천이 감싸도는 북향 땅이다. 그러므로 남쪽에서 올라오는 일본 왜군을 대적하기엔 지형지세를 활용해 조령에서 배산의 진을 치고 왜군을 상대했으면 더 좋았을 것으로 본다.

삼국시대 요충지인 충주는 백제 고구려 신라 3국의 각축장이었다. 따라서 충주를 차지한 나라가 그 시대에 가장 번성했는데 신라는 충주를 점유하여 통일신라시대를 열었고 고려는 충주를 국가에 충성하는 고장으로 지명(地名)까지 개칭했고 조선조에 와서도 충주를 으뜸의 도시로 삼았다.

충주는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이 합수하는 호반의 도시이며 산과 물이 좋아 산수가 빼어난 곳이다. 산이 좋으면 인물이 나고 물이 좋으면 재물이 난다고 산관인정수관재물(山管人丁水管財物)이라고 했다. 음양오행의 관점에서 보면 충청도는 나라의 중심이기 때문에 토(土)에 해당하는데 토의 성질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중재하며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 예로 삼국을 통일한 중추적인 인물인 김유신 장군이 충청도 진천에서 출생했고, 충주로 이주한 우륵이 음악의 꽃을 피운 곳도 충주 탄금대이며,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도 충주 출신이다. 이처럼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라의 중심, 충주에서 큰 인물이 나와 충절을 발휘했던 것처럼 이제 토(土)의 성질을 가진 충주에서 통합 통섭의 시대를 열어갈 중추적인 인물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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