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 전 청주예총 부회장

지난 5월초 잠깐 귀국했다가 출국할 때 공항보안요원과 소지품 때문에 실랑이를 벌인 적이 있었다. 필자와 함께 근무하는 여선생의 딸아이가 잔병치레가 잦아서 걱정이라고 하기에 약을 구입해 가다가 걸린 것이다. 조그만 병에 물약이었지만 상표를 보더니 폭발물이 아닌 것이 확실해 일단은 통과시킬 듯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로 필자가 신경질적으로 말대답을 하자 엉뚱하게도 아까 그 약병을 트집을 잡는 것이다. 필자는 갑자기 부아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보안검사의 목적이 무엇인가, 폭발물 등 테러방지에 있는 것 아닌가? 규정만 따지지 말고 융통성을 발휘할 수는 있지 않은가?”라며 강력히 항의했으나 문제의 그 약병은 압수당하고 말았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자신이 미워질 때가 있다. 필자는 뼈에 사무치도록 이것을 경험을 했다. “조금만 참고 고분고분 했더라면 이 지경까지는 안 올 텐데!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뭘 배웠다는 말인가? 언제 철이 든단 말인가, 한심하다!”는 등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불같은 성미 때문에 형제 같이 지냈던 친구에게도 버림받은 쓰디쓴 경험도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성내면 안 된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왔다. ‘성내는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만병의 원인이 된다. 모든 공덕을 태워 버린다. 나를 망치고, 남도 망치고, 온 세상을 망친다’라며 다짐에 다짐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오늘의 처신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외운들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헛공사 아닌가?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는 말이 있다. 두 수레바퀴중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수레는 굴러갈 수가 없다. 아는 바를 실행에 옮기려면 수행이 필요하다.

공항 대합실에서 스스로를 꾸짖으며 곰곰이 궁리하다가 섬광(閃光)처럼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광주리’였다. 우리는 광주리 하나씩을 옆구리에 차고 다닌다.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음식을 먹을 때나, 술 마시며 친구들과 놀 때나, 등산이나 산책을 할 때나, 사랑을 할 때도, 심지어 테니스장 게임을 할 때도! 우리는 그 광주리를 언제 어디서나 옆구리에 차고 다닌다. 그 광주리에 독사 한 마리가 들어 있다.

독사는 성질이 하도 사나워 자칫하면 몸을 다치고, 심하면 생명도 위협한다. 뱀을 잘 다스려야 한다. 그 독사는 바로 ‘화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수행이 덜된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잘 다스리기는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 독사를 잘 다스린 사람은 수행이 잘 된 사람이며, 그 광주리를 아예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예수나 공자나 석가 같은 성현군자라 할 수 있겠다.

운동장을 걸을 때도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뱀이 든 그 광주리를 잠시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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