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들이 김시민, 남이, 정충신이 있지만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기에 그의 높은 충의(忠義)를 기념해 의미를 부여해 본다.

그는 스물한 살에 결혼을 해 스물여덟 살에 훈련원 병과에 응시하여 떨어지고 나서 포기하지 않고 서른두 살에 도전하여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에서 권관(작은 고을의 파견 소대장격)으로 초급장교로서 임무를 시작했다. 백세까지 산다고 하는 지금처럼 평균수명이 길지 않은 때임에 비추어 상당한 나이임에 틀림없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마흔일곱 살 되던 해(1591)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 당상관)가 되었다. 1천953년에 삼도수군통제사(함대사령관, 해군작전사령관)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기간(1592~1598) 중 옥포해전에서 군사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고 하여 그가 이끄는 조선수군은 옥포에서 처음 일본의 수군을 격파하였다.

그는 피해를 전혀 입지 않고 물리친 전투가 많을 정도로 훌륭한 전술과 지휘를 하였고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명언 등으로 수군의 사기를 높이는 리더십도 가졌다. 아홉 차례의 수전에서 압도적인 일본 수군의 물량을 소수의 조선 수군을 지휘하여 전승하고 결국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명장이었다. 

그는 친일파 세력의 음모에 휩싸여 일본 수군을 격파함에도 불구하고 역모죄의 누명으로 전쟁도중 수도로 불려와 감옥에 갇힌다. 친일파의 계략이 성공한 것으로 조선 수군은 각개격파 당하고 전투가능 배가 열두 척 밖에 남지 않게 된다.

일본 수군은 삼백 척이 넘는 막대한 물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이순신이 없으면 전쟁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다. 친일파들에 의해 감옥에 갇혔으나 나라에 대한 충의를 잊지 않고 열 두 척을 이끌고 일본군의 삼백 여척을 상대로 대승하며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승전을 지휘하다가 함상에서 전사했다. 친일파들에 의해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는 죽음으로 나라에 충성을 하였다는 사실 그것이 존경받는 이유라 여겨진다. 

이순신은 동전에도 거북선이 나와 있듯이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고 친숙한 겨레의 리더이자 영웅이다. 그가 걸어온 시간의 부침 속에 배어난 그의 삶의 명언을 실천에 옮기려고 도전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이 요즈음 점차 줄어드는 것 같다. 그가 살아온 길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몇가지 긍정적인 삶의 지침을 소개한다.

그의 인생 여정 속에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하지 않고 조직의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않았다. 집안이 나쁘다 말하지 않고 머리가 나쁘다고 탓하지 않았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않고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않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않고 죽음을 두렵다고 말하지 않았다.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참으로 장한 일을 해낸 인생의 길이다. 과연 내가 이순신의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해 갈 수 있을까?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을 맞이하여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를 견지해 가며 이순신의 정신을 알려 실천해 갔으면 하는 소소한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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