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금이성을 뒤로하고 언덕에서 바라본 비암사는 풍경조차 애잔하다. 산은 말이 없고 절집은 눈물을 머금었다. 가람 배치는 정제되었는데 삼층석탑이 극락보전에서 몇 보쯤 동쪽으로 치우쳐 혼자 얌전하게 서 있다. 나지막한 산이 양팔을 벌려 한 아름에 쓸어안고 있어 절집은 아담하고 정겹다. 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지나노라면 800여년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금강역사처럼 눈을 부릅뜨고 서있다.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

계단에 흰 글씨로 쓰여 있는 경구가 큰뜻으로 다가온다. 아미타부처님의 말씀으로 생각된다. 마당 저편에 극락보전이 단정하다. 현존하는 세계가 극락정토이든 사바세계이든 아니 온 듯 다녀가야 한다. 역사에 흔적을 남기려 발버둥쳐도 그것은 한낱 허무한 티끌일 뿐이다. 제행이 무상이다. 비암사의 역사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2천여년 전 창건한 삼한 고찰이라고도 하고, 문무왕 13년에 혜명대사가 지은 절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1960년 이 지역 출신 한 대학생이 삼층석탑 상륜부에서 발견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석(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지 13년 만인 673년 4월 15일, 인근에 사는 전씨가 백제 국왕과 대신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탑을 세운 것으로 밝혀졌다. 백제가 멸망하고 계속됐던 백제부흥운동에서 가족과 친지를 잃은 백제 유민들이 뜻을 모아 지었다는 설이 맞을 것 같다. ‘비암’이 불비석으로 밝혀졌지만 발음 때문에 ‘뱀절’이라 알려지기도 했었다. 절의 동쪽 끝에 구렁이 굴이 있어 새벽마다 총각이 내려와서 탑돌이를 하고 굴로 돌아갔다는 전설도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극락보전은 조선시대 지어진 건물이다. 자연석으로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기단 위에 널찍한 덤벙 주추를 놓았다. 배흘림이 뚜렷한 둥근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서까래나 도련 부연이 다 정교하고 아름답다. 빛바랜 단청이 정밀해 미의 극치를 이룬다.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는 현판의 필체는 마치 정토에 도달한 어느 묵객이 대충 써서 걸어놓은 것처럼 순진하다. 한편으로는 날카롭고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기둥마다 주련은 현판보다 세련된 필체이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부처님의 미소가 자애롭다. 중생을 불자의 이상향인 정토로 인도한 뒤 깨닫는 법열의 미소가 이러할까? 부처님은 매우 높은 연좌에 모셨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불이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밖에서는 아무렇게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협시불처럼 서 있다. 극락보전 바로 뒤에 대웅전이 있다. 극락보전에서 영산회 괘불탱화가 발견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탱화로 모셔져 있어 최근에 한 청신녀의 시주로 대웅전 불사 일으켰다고 한다. 매년 4월 15일 백제대제 때는 영산회 괘불탱화를 밖으로 모시고 야단법회를 연다.

권력을 쟁취한 자는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지우려 애를 쓴다. 그러나 역사는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서 역사가 묻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냥 가는 것이다. 내가 온 것 자체가 쓰레기이니 아니 온 듯 그냥 가는 것이다. 마음에 두지 말고 비우고 가야 한다. 내려놓을 것도 가져갈 것도 없이 그냥 허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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