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칼럼]입학식 추억
[오늘의 칼럼]입학식 추억
  • 충청매일
  • 승인 2016.03.0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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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전 청주예총 부회장

두 눈이 정렬되지 않고 서로 다른 지점을 바라보는 시력 장애를 ‘사시’ 또는 ‘사팔뜨기’라고 한다. 필자는 이로 말미암아 ‘먼 산 두루배기’라고 놀림을 받으며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지게를 지고 밭에 가다가 중학교 모자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가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 그지 없었다. “내년에 중학교 보내주마!”라는 아버지 말씀에 죽을힘 다해 농삿일을 했다. 

아버지 약속대로 이듬해 중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1960년은 독재 자유당을 무너뜨린 4·19 학생의거가 있었던 해이다. 그해 4월 5일 필자는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에 입학한 날이지만, 일생일대 쓰디쓴 경험을 했다.

입학식을 마치고 길을 걸어가는데, “야 촌놈! 웬 촌놈이냐?“라는 등 필자를 놀리는 ‘꼬마녀석(?)’들이 있었다. 읍내 초등학교 출신 조그만 녀석들이 시비를 걸었다. 키가 유난히 컸던 시골뜨기 소년은 못들은 척 묵묵히 걸어갔다. 반응이 없자 뒤에서 모자를 잡아당기며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키나 체구로 봐선 어린애들 같이 보였다. 참다 참다 못해 할 수 없이 난생 처음 싸움이란 걸 하게 됐다. 키나 체구로 봐서 필자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왜소한 친구와 싸움한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다. 이겨도 본전 못 찾을 장사다. 싸움에 전혀 경험이 없었던 시골소년!  그러니 어떻게 힘을 쓸 방도가 없었다. 드디어 ‘붕’하고 허공에 뜨더니 뚝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이것은 고난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이것이 도화선이 돼 그때부터 필자를 모두가 깔보고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차라리 집으로 되돌아가 농사일 하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들어온 학교인데! 나에겐 물러선 곳이 없다. 물러선다면 농사짓는 곳 뿐이다. 죽어도 여기서 죽자! 어떻게 입학한 중학굔대!”라고 다짐하였다. 시골뜨기 중학생으로서는 비참하고 참혹한 경험했다. 남에게 짓밟힌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인가! 진퇴양난의 역경을 과감히 맞선 그때의 각오! 그것은 필자의 일생에 큰 자산이 됐다. 

희망과 기대의 3월! 새학교, 새학년,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 그리고 새로운 교과! 학교에선 모든 것이 새로이 시작되는 3월이다. 3월의 의미는 대단하다. 새로운 각오로 새학년을 맞이할 때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세상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닐 것이다. 고난의 연속이 될 것이다. 이들에게 3월에 필자의 좌우명을 들려주고자 한다.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없으면 교만한 마음과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돋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어려움과 곤란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라!’고 하셨느니라.’ 그렇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라고 굴하지 않는 강인한 각오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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