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충북작가회의 회장

간만에 내린 눈으로 세상이 하얗다. 발자국을 내지 않으려고 창문 너머로만 마당을 살폈다. 종일 눈이 내리며 마당은 더더욱 하얘졌다. 눈 덕분에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다. 이따금 고양이가 마당을 가로질러 뒤꼍으로 가며 발자국을 남겼지만 내리는 눈에 이내 묻혀버렸다. 종일 그렇게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바깥풍경을 구경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겨울 냄새가 좋아 치우지 않고 며칠을 그대로 둘 작정이었다. 또 아무 흔적도 없는 깨끗함이 보기 좋아 그대로 두고 보려했다.

그런데 저녁나절에 전화가 왔다. 나오란다. 평안한 이 기분을 깨기 싫어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지고 말았다. 아니, 이미 전화가 울리면서부터 내 마음은 그리 결정한 지도 모르겠다. 이 좋은 날 누구라도 날 불러주는 이가 없었다면 무척 서운했을 것 같기도 했다. 언제나 마음은 이중적이다. 마당에 쌓인 눈이 발등까지 차오른다. 내 발자국을 눈 위에 새기며 대문을 나섰다.

사람들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나는 다리를 건너 집과 멀어져갔다. 다리 위 눈길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다. 문득 다리 아래를 보니 오리들이 떼를 지어 물길을 거슬러 헤엄을 치고 있다. 몹시 어설퍼 보이는 것은 내 마음인가. 내 마음과는 달리 오리들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차가운 물속에서도 자유롭기만 하다. 휴대폰을 꺼내 그 모습을 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사진이 조금은 색다르다.

2층 카페에서 내다보는 거리풍경이 아름답다. 어스름이 밀려오며 형형색색 조명이 비치자 눈 내리는 거리가 더욱 아름답다. 허 생원처럼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얀 달빛이 너무도 좋아’ 그만 도를 넘고 말았다. 눈에 취한 것인지 술에 취한 것인지 되지도 않는 말을 너무도 많이 쏟아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오는 대로 생각도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뇌를 번뜩하고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지니라’는 서산대사의 시 구절이었다.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쏟아낸 수많은 말은 어찌할꼬.

차라리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앞에 앉은 친구처럼 그저 빙긋이 웃고만 있을 걸……. 후회막급이었다. 왜 그랬을까. 뭐가 허전해서 그랬을까. 가만히 있다고 내 존재가 없어지는 것인가. 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저도 모를 소리로 친구 마음을 혼란하게 만든 것이 부끄러웠다. 그걸 알면서도 질타하지 않고 묵묵하게 들어주는 친구에게 미안했다. 아무래도 눈 때문이라고 자꾸 핑계를 대고만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내가 쏟아놓았던 하찮은 말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정신이 어지러웠다. 정신이 어지러우니 발걸음도 흔들린다. 당사자도 이럴진대 듣기만한 친구는 어떠할까. 돌아가는 친구의 어지러운 발자국이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다. 모처럼 만난 친구를 가볍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혼란하게 만든 것이 못내 미안하다.

내리는 눈이 어지러운 발자국들을 덮어버리고 있다. 내 발자국도 어서 덮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쏟아냈던 부끄러운 말들도 눈 속에 묻혀 사라졌으면 좋겠다. 내일은 ‘눈 덮인 들판’은 커녕 집마당에도 발자국을 내지 말아야겠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