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물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생(生)을 위한 절체절명의 요소가 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물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잊고 살아온 것 같다. 또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아도 물리적인 현상이려니 했지 그 흐름에서 사람 사는 지혜가 있는 줄은 몰랐다.

17세기경 서양에서는 영국의 뉴톤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이란 법칙을 발견하여 자연철학의 기초를 쌓았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중국의 노자(老子)가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도(道)의 상징적 이미지로 비유하고 인생철학의 근원이라 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로 표현되는 이 말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명 구절이다. 반기문 UN사무총장도 새해 들어 이 구절을 직접 휘호를 써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세계평화를 위한 한마음이란 뜻이라 생각된다. 노자가 상선(上善)을 물에 비유한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수평을 유지하기 위한 현상이지만 노자는 그 수평을 공평(公平)의 의미로 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불평은 공평하지 못 한데서 비롯되기에 물이 항상 공평하게 흐르는 것을 삶의 최선(最善)으로 본 것이다. 정말 이세상은 공평한 것일까.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빈부의 격차는 있다 해도 가난한 근로자의 능력만큼은 대우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난하고 힘없는 근로자에게 제발 오너의 갑(甲)질 만큼은 없어야 하고, 서로 존중하고 공평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싶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넣으면 네모로, 둥근 그릇에 넣으면 둥글게 모양은 변해도 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법정스님도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라고 했다. 물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 그래서 물은 항상 흐르면서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 인간 세상에도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것이 물과 같지 아니한가.

요즘 4년마다 오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물갈이를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새로운 인물일까. 어떤 이념을 가진 정당인지 그 정체성도 알 수가 없다. 말로만 변화와 개혁을 외쳐 대지만 변화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중상모략과 꼼수를 동원하는 비겁함과 졸 열함으로부터 정의롭고 정직하고 당당했으면 좋겠다.

물은 언제고 아래로 흐른다. 낮게 있는 모든 것을 촉촉이 적셔주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웅덩이가 있으면 구석구석 모두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흘러가는 겸손의 미덕을 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물처럼 겸손하고 개혁을 이끌 청렴한 일꾼인지 이번만은 잘 뽑아서 민의(民意)가 바로서는 법치의 전당이 됐으면 한다. 비극적인 현실에 미래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실망을 줄까 그 걱정이 태산이다. 이 병들고 비정상적인 사회를 누가 만들었는가.

‘윗물이 맑아야 아래 물도 맑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층의 리더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보고 듣는 수많은 비정한 사건에는 고개를 돌리고, 맑고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는 길을 찾는데는 눈을 감고, 제몫 챙기는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지 않는가. 사회가 병들어서는 희망이 없다. 선(善)을 지향하는 따뜻하고 맑은 물이 흘러 내려야한다. 위에서 아래로! 그래서 이 세상 구서구석, 모든 가정, 어린 새싹들을 촉촉이 적셔주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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