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평사낙안(平沙落雁)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평산리(平山里)
(충북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충북학생종합수련원)

▲ 상산팔경 중 하나인 평사낙안(平沙落雁)은 미호천과 초평천이 만나는 평산리 합수부의 10리나 되는 백사장에 겨울이 되면 기러기 떼가 내려앉는 모양이 장관이라는데서 유래됐다.

미호천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곳

진천의 명승 상산팔경 두 곳 포함

 

김봉곤의 ‘청학동예절학교’

농촌분위기·자연과 부조화

 

양천산 끼고 있어 기암절벽

자연석 이용한 ‘돌보’ 발달

 

미호천 구간들이 대부분 제방 둑을 쌓는 등 하천정비가 이루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그에 비해 제방 없이 자연하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구간은 충북 진천군 문백면 농다리에서 충북학생종합수련원까지 7~8km구간이다.

미호천과 초평천이 합류하는 구간 평산리에서 시작된 답사는 우안을 따라 평산리 마을을 지나고 미호천과 접해있는 양천산(350m)을 지나 충북학생종합수련원에 이르렀다. 농다리 주변과 함께 미호천의 전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지역으로 꼽히고 있는 이 구간은 진천의 명승지인 상산팔경(常山八景)이 두 곳이나 포함돼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 따르면 고려 성종 때부터 진천의 옛 이름을 상산(常山)이라 불렀다. 상산(255m)은 충북 진천군의 중앙에 위치한 산으로 진천읍 장관리, 이월면 사곡리, 백곡면 명암리에 넓게 걸쳐 있다. 이들 지역에 가뭄이 들면 상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에 주민들에게는 정신적인 중심이 되는 산이다. 한 가지 풀어야할 과제는 1872년 지방지도에 표시된 상산(이곡면과 광혜원면의 경계)은 현재의 상산과 위치가 다르다는 점이다. 하지만 진천을 오랫동안 상산으로 불린 것은 사실이며 상산팔경이라는 말은 이 상산에서 유래된 것이다.

상산팔경 중 첫 번째 절경으로 꼽는 것이 평사낙안(平沙落雁)이다. 평사낙안은 문백면 평산리(平山里) 미호천과 초평천이 만나는 합수부의 10리나 되는 백사장에 겨울이 되면 기러기 떼가 내려앉는 모양이 장관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두 번째 절경은 우담제월(牛潭霽月:문백면 은탄리 우담에 달이 비칠 때의 정경)이며 금계완사(錦溪浣紗: 만승면 광혜원리 금계), 두타모종(頭陀暮鐘:초평면 화산리 두타산 영수암 저녁 종소리), 상산모운(暮雲:이월면 사곡리 저녁놀과 구름), 농암모설(籠岩暮雪:문백면 구곡리 농다리 위의 눈), 어은계석(漁隱溪石:문백면 봉죽리 정철의 묘소가 있는 계곡 풍경) 등이 팔경에 속하며 마지막 여덟 번째 절경은 적대청람(笛臺晴嵐)이라 하여 문백면 평산리 백사장에 있는 한 암벽(臺)이다. 옛날에는 이 암벽 위에 정자가 있어 가끔 신선이 내려와서 피리를 불며 놀았다고 전하는데 화창한 날 이곳에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의 정경을 상산팔경의 하나로 꼽을 만큼 아름다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상산팔경 중 두 곳이나 평산리에 속해 있을 만큼 평산리는 물길로서 빼어난 풍광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양천산이 만들어준 기암절벽과 넓은 모래백사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모래사장은 억새와 갈대로 우거져 있어 10리나 되는 모래 백사장과 기러기 떼는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오래전 모래 백사장을 개간해 농토로 사용했던 것과 물의 유속 변화 등이 풍경을 변형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부분의 미호천구간은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흐르고 있어 홍수피해를 대비해 제방을 쌓거나 보를 만들어 물을 가두는 구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구간은 바위가 많은 양천산을 끼고 있어 구조적으로 제방을 쌓을 수 없으며 농부들이 이용하던 자연 돌보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석을 이용한 농다리와 농다리 위에 있는 돌보, 학생수련장 근처 또 하나의 돌보가 그것이다.

모래백사장이 있는 평산리는 원래 평사(平沙)리라는 지명에서 변형된 것이다. 평산리는 진천군청에서 동남쪽으로 약 8.4㎞에 있다. 이치리, 평사리, 통산리를 병합하면서 평사와 통산의 이름을 따 평산리라 한 것이다. 자연마을로는 대박골, 배티, 성주머니, 아래통미, 위배티, 평사가 있다. 성주머니는 평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지형이 성을 쌓아 놓은 것과 비슷한 높이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 부분은 틔여 있어 성문과 같다 하여 성지문(城地門)이라 불리던 것이 변한 이름이다.

미호천의 일곱 번째 지천인 초평천 합수부에서 우안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평산리 마을을 통과해야 한다. 평산리는 여흥 민씨들의 집성촌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을 지나다 스물세 살에 시집와 평생을 평산리에서 살았다는 여흥 민씨 집안의 한 할머니(74)를 만났다.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이지. 인심 좋고 조용하고. 더 바랄게 없어. 시집와서 5남매를 아무 탈 없이 키워 시집장가 보냈으니 그만하면 좋은 거지. 요즘은 저기 저 김봉곤 학교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 땅값도 오르고. 마을이 변하고 있어.”

할머니가 가리키는 ‘김봉곤의 청학동예절학교’의 큰 기와집이 한눈에 들어 왔다. 김봉곤 학교의 진천 평산리 입성이 평산리 마을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는 할머니 말씀 속에 속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평사낙안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자연풍광에 세워진 김봉곤 학교는 평산리의 소박한 농촌분위기와 미호천의 자연스러운 물줄기와는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지나치게 웅장한 건축물이 미호천과 바로 인접해 지어졌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미호천 우안을 따라가는 길은 김봉곤 예절학교에 가로막혔고 예절학교 뒤꼍을 통해 양천산둘레 길을 따라 갔다. 양천산 둘레 길은 등산객이나 낚시꾼들에 의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이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위험하다. 좁고 비탈진 길이며 중간 중간에 큰 바위와 산성을 축조했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양천산성(凉泉山城)이 축조된 연대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해발 350m의 양천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며 규모는 길이가 약 400m다. 임진왜란 때 양민들이 이곳으로 피신해 왜병에게 저항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설화가 전해진다. 왜군이 한양성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문백면 평산리 1천여 명의 주민들은 모두 피난을 가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마을의 한 젊은 선비는 짐을 꾸릴 수가 없었다. 늙으신 부모님을 피난길에 오르게 할 수 없는데다 부모님을 그냥 남겨 두고 떠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선비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늙으신 부모님 곁을 떠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잠을 자던 선비는 꿈속에서 “내일 날이 밝거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앞산으로 올라가거라. 그곳에서 맑은 샘물이 있는 곳을 발견할 것이니 그 둘레에다 성을 쌓아 몸을 피하면 이 마을은 화를 면하게 될 것이다”라는 현몽을 들었다.

꿈의 내용대로 선비는 마을사람들을 설득해 산에 올라가 맑은 샘물 둘레에 성을 쌓았고 마을 사람들은 피난 대신 성 안으로 피했다. 얼마 후 왜군이 쳐들어와 성을 공격하려 하자 별안간 샘물이 폭포수처럼 솟아올라 왜군들을 쓸어가 마을 사람들은 화를 면했다는 전설이다.

양천산을 따라 굽이굽이 S자형을 이루는 미호천은 평사낙안답게 중간 중간 모래톱이 매우 발달돼 있다. 미호천 우안 쪽에 설립된 충북학생종합수련원은 천혜의 자영경관을 품고 있는 셈이다. 수련원은 충북에 재학 중인 청소년들에게 체험학습 위주의 프로그램을 통해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청소년 육성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취재지원 미호천 지킴이 전숙자·임한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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