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통대학교 행정학과

염우염치(廉隅廉恥)는 염우와 염치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염우란 ‘품행이 바르고 절개가 굳음’을, 염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이른다. 옛날 선비사회에 사람을 평가할 때 이 염우염치를 중시하는 사품(士品)인 절개와 지조로 판단하였다. 옛 선비들은 꽃의 서열을 정할 때도 그 아름다움이나 향기보다 절개가 있느냐 없느냐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에 진달래가 다른 꽃에 비하여 높은 정오품의 품작을 받았다. 진달래는 메마른 땅에서, 오로지 북쪽을 향해서만 피는 일편단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피폐하고 왜적에게 가정이 무너지는 와중에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여인이 역사에 많이 기록되고 있지만, 목숨을 버리면서 염우염치한 사대부는 대조적으로 아주 적었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정권이 바뀌고 외침을 당하였을 때 염우를 알지 못하고 자기의 이익만 추구한 사대부가 많았다. 일제시대에는 이것이 극에 달하고 있다.

지금 정치권은 탈당과 입당이 빈번하고, 이합집산이 아침저녁으로 일어난다. 그 명분을 보면 정치개혁과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데 그 행태를 보면 염우도 없고 염치도 없다. 단지 눈치만 있다. 여당은 청와대 눈치 보고, 야당은 여론 눈치 보고, 여야 대표는 계파 눈치 보고, 국회의원은 공천위원회 눈치만 보고 있다. 정치하고 정치하겠다는 사람들이 눈치를 합하면 백 단은 넘을 듯하다.

여당의 책사가 대립하던 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되고, 정계 은퇴한 정치인이 비례대표나 전략적으로 공천하라면서 정당에 기웃거리고, 같은 국회의원이라고 당 윤리위원회에서 징계받은 사람 구명운동하고, 합의한 법안을 무력화하고, 새 정치 한다면서 구시대 정치인만 보이는 것이 어찌 염우염치한 정치판이라고 할 수 있는가?

속된 말에 염치가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한다고 한다. 지금 정치판을 보면 염치는 없지만, 눈치가 많으니 위안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론의 눈치를 살핀다고 하지만 그 눈치는 혼자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속눈치에 불과하니 위로받을 일은 아닌 듯하다.

정당은 정치적인 주의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를 의미한다. 정당은 이념을 가진 사람들의 절개와 지조로 뭉쳐야 제대로 된 정당이다. 이 정당의 운영원리는 염우염치이지 눈치가 아니다. 지금 이합집산하는 우리의 정당을 보면 절개와 지조로 지켜야 할 이념도 없고,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목표도 없다. 그래서 이합집산한다.

염우염치가 없고 권력만 탐내면서 눈치를 키운 사람들에게서 새 정치와 정권교체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J. 드라이든은 “악인은 염치가 없어도 잘살고 착한 사람들은 뻔뻔해질 수 없어서 굶주린다”라고 하고 있다. 우리 정치인이 악인은 아니지만, 그 행태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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