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석 한국교통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좀비 영화나 드라마, 문학에서 생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다. 바로 좀비가 되는 것이다. 좀비가 되어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에게 증오의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죽은 자의 시신은 존중하지만 좀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좀비에 대한 두려움은 단지 죽음의 위협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웃과의 거리감을 획득하면서 프라이버시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웃과 공유할 수 있는 일들은 그만큼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이웃이 아닌 보안업체들이 도둑을 지켜주고, 봉변을 당하더라도 이웃을 찾기보다는 119에 전화를 걸어야 한다. 이제 이웃은 사촌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심지어 잠재적 가해자로 여겨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불안과 공포는 이웃과 함께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웃해 있는 것이다.

좀비에 쫓기는 공동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바로 불확실성이다.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은 이 불확실성을 가장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구도 속에서 사람들은 공포를 느낀다. 생존인의 공동체들은 끊임없이 다른 이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한다. 스마트폰을 통해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다. 이것은 마치 현대인들이 스마트폰을 손에 놓지 않고 끊임없이 누군가와 접속해 있으려고 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좀비가 영화 속에서 사람들에게 미친 해학 중에 하나는 바로 기존 공동체를 해체시킨 것이다. 가족공동체, 마을공동체, 기업공동체와 같은 기존의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생존한 이들이 급작스럽게 만나 조직한 공동체는 생존에 관한 압박으로 인해 안정감을 제공하기 힘든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 공동체는 고립된 상태로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이와 같은 자신들의 모습을 이들에게서 발견한다. 미국은 물론 한국 사회 내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인 가족 내에서의 의사소통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몇 년 전 신문기사에 직장인 가족대화시간은 하루 평균 28분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나왔다. 가장 안정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가족 그 중에 부부는 그들의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황혼에 이혼으로 파괴되어 간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결혼생활 20년이 넘는 부부의 황혼이혼이 늘어나고 있다. 황혼이혼 비율이 신혼이혼의 비율을 앞지른 것이다. 부부가 정서적이나 관계적 공동체가 아닌 기능적 결합체로서 존재하다가 자식 양육이라는 결합동기가 사라지자 각자의 삶을 선택하고 있다.

공동체의 해체는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인식하고 또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기본적인 생존 욕구이다.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내부의 중요한 욕구들이 아주 잘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는 불확실함을 줄여가고 싶은 욕구가 있다. 불안을 참으로 싫어하는 인간은 불안을 극대화하는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