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미호천이 낳은 인물 보재 이상설(충북 진천읍 가산리 가산교~초평면 중석리 오갑교)

▲ 진천읍 산척리 보재 이상설 동상과 생가 모습.

덕금로, 다양한 거미 군락 이뤄

한천천, 백곡천과 관계없이 합류

진천군지 정보 오류 바로잡아야

산척리 산직마을서 출생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 독립 호소

미호천 물길을 따라 걷는 동안 달이 바뀌어 9월로 접어들면서 더위가 한풀 꺾였다. 답사 길에서 만난 한줄기 소나기가 구름과 더위를 몰고 가 하늘이 청명해지고 물길 주변 풍경이 선명해 보기 좋았다. 9월 첫째 주 충북 진천읍 가산리 가산교에서 출발해 미호천 우안 덕금로를 따라 진천군 초평면 중석리 오갑교까지 답사했다.

미호천 우안 덕금로를 따라 걷는 길에는 유난히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고 거미군락지가 눈에 띄었다. 거미는 아기들 주먹만 한 산왕거미부터 긴호랑거미까지 다양한 종류의 거미들이 부분적으로 군락지를 이루고 있었다. 산왕거미는 등딱지가 적갈색이며 다리는 크고 강하게 생겼다. 다리에 암갈색 고리무늬가 있고 가시털이 많이 나 있다. 주로 강변이나 계곡, 농경지 등 수변에 서식하는 산왕거미는 저녁에 큰 둥근 모양의 그물을 치고 아침에 거두며 낮에는 은신처에 숨어 있는 특징이 있다.

산왕거미에 비해 화려한 색을 띠고 있고 몸이 길고 날렵하게 생긴 긴호랑거미는 일년 살이이고 알은 알집에서 가을에 부화하고 그대로 월동해 이듬해 봄에 1회 탈피를 한 후 흩어진다. 인가 근처에서 산기슭까지 서식하고 밝은 초원과 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별로 높지 않은 곳에 원형으로 거미줄을 친다. 거미는 항상 거미줄 중앙에서 거꾸로 매달린다. 자극을 받으면 그물을 강하게 흔든다. 호랑거미에 비해 다소 온순하다고 한다.

상신리 앞에서 만난 이 구간 첫 번째 세월교 위에서 바라본 미호천은 손을 대지 않은 전형적인 자연하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물길은 적당히 굽이돌며 모래톱과 하중도, 여울 등 하천의 생태계에 필요한 조건이 잘 어우러져 있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모래톱 위에는 흰뺨검둥오리와 원앙아기들이 머물고 있었고 중대백로와 백로들이 물 위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풍경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우안의 제방 둑은 대부분 시멘트 포장이 돼 있지만 중간중간에 비포장 길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비포장길은 그만큼 걷는 발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안 쪽에는 진천읍 상신리 마을을 지나 잔다리 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진천읍 산척리, 초평면 중석리로 연결된다. 좌안 쪽으로는 진천군 덕산면 인산리와 초평면 오갑리로 이어진다. 미호천 좌안에서 인산리와 오갑리 사이를 두고 흐르는 한천(閑川)천이 오갑리 영주원 사거리 앞에서 미호천과 합류한다. 한천천은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와 삼봉리를 따라 덕산면 한천리를 지나 오갑리로 흐르는 물길로 미호천과 다섯 번째로 합류하는 지천이다.

진천군지에 따르면 한천(閑川)천은 ‘충북 음성군 대소면에서 발원해 진천군 덕산면 한천리로 남류하다가, 초평면 오갑리를 지나 문백면 구곡리에서 백곡천과 합류해 미호천(美湖川)으로 흘러든다’고 돼 있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다. 한천천은 미호천 좌안에서 합류하는 지천으로 백곡천과 미호천이 만나는 지점보다 약 2km 상류에서 미호천과 합류한다. 한천천은 백곡천과는 관계없이 먼저 미호천과 합류하는 지천이다. 백과사전과 진천군지 등에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천(閑川)천의 본래 이름은 한내이다. 한내는 ‘큰 내’로 풀이되는데 한천이 내 이름에서 마을 이름으로 전용되어 쓰이자,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를 한천에 천을 더해 한천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천천 합류지점을 지나 산척리와 오갑리를 잇는 세월교를 지나면 513번국도 미호1교가 미호천 위를 지나고 다시 세 번째 세월교를 만나고 초평로로 이어진 오갑교에 다다른다. 이 구간의 전체 물길을 놓고 보면 좌안으로 배가 불룩하게 나와 반달모양을 하고 있다. 오갑교까지 답사를 마치고 미호천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인물 보재 이상설 생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보재(敷齋) 이상설 선생(李相卨, 1870~1917년)은 경주가 본관으로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이행우(李行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뛰어나고 총명했던 선생은 25세 때 조선의 마지막 과거 갑오문과에 급제, 27살에 성균관 교수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했다. 선생은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결연히 맞서 이를 철회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투쟁을 펼쳤다.

이후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으며 1906년에는 용정촌에 항일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은 연변에 이주한 한인들이 전통적으로 실시하던 구식 교육을 신식 학교 교육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07년에는 광무황제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파견돼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당시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인 국민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연해주를 비롯한 북간도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을 규합해 국외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데 기여했다.

독립운동에 열중한 나머지 건강을 돌보지 못한 선생은 1916년 초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석에 눕게 돼 투병생활에 들어갔지만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생가는 초가집 정면 5칸, 측면 2칸의 一자형 평면인데 흙 벽돌을 쌓고 진흙으로 마감됐다. 중앙 2칸 앞으로 툇마루가 달린 안방이 있고 이 방 사이에는 4분합 미닫이문을 달았다. 좌측에 1칸 크기의 부엌이 있으며 우측 툇마루 부분까지 확장한 큰 웃방을 드렸고 옆으로 다시 웃방에서 사용하기 위한 1칸의 툇마루를 드렸다. 구조는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위에 덤벙 주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삼량집으로 꾸며졌다. 약 40여 년 전에 무너진 것을 1988년에 보수했으며 1997년 정화사업 당시 진천읍 교성리 향교말에 있던 사당 숭렬사(충북도 기념물 77호)와 숭모비를 생가터로 옮겨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진천군은 최근 2017년 선생의 순국 100주기를 맞아 2018년 완공을 목표로 ‘보재 이상설 기념관’을 건립키로 했다. 기념관은 전시실·추모실·자료실 등을 갖춘 1천917㎡ 규모로 선생의 생가 인근에 건립해 역사교육장과 휴식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진천군은 이상설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선생의 생가와 묘소, 숭렬사를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선생의 생가 산척리는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산직리(山直里)의 ‘산(山)’자와 장척리(長尺里)의 ‘척(尺)’자를 따서 산척리(山尺里)라 했다. 산직은 장자울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경주이씨 산지기가 살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장척은 산직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 때 임연(林衍) 장군이 살던 곳이라 한다. 학문과 덕망이 높은 장자(長者)가 덕문이방죽 가운데에 바위로 울타리를 치고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장자의 음을 나타내는 ‘장(長)’과 자의 뜻을 나타내는 ‘척(尺)’을 빌려 장척이라 했다. 산척리 생가 뒤쪽으로는 낮은 구릉들이 펼쳐져 있고 앞은 넓은 들(잔다리들)을 형성하고 그 들 앞으로는 미호천이 흐르는 것이다. 산척리는 기후가 온난하고 수량이 풍부한 편으로 사람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있다.

취재지원 미호천 지킴이 전숙자·임한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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