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운주산성에서 스산한 마음을 뒤로 하며 무거운 발길을 고산사로 돌린다. 내려오는 길에 무너져 구르는 돌마다 백제 유민의 눈물이 발길에 차인다. 산야에 얽힌 옛이야기를 헤아리는 것도 잠시 어느새 고산사를 이르는 표석 앞에 이른다. 고산사란 이름이 운주산은 본래 고산(高山)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석양은 오히려 차고 바람은 볼에 따갑다. 비탈길을 오르다가 ‘백제루’라는 종각을 만난다. 백제루 앞에 소박한 공덕비에는 운주산성의 유래, 백제 부흥운동의 개요, 1997년 고산사 창건의 동기와 백제극락보전 중창의 의미를 간략하게 적었다. 여기서 창건주 최병식 박사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백제루, 백제극락보전, 백제선원 등 전각에 붙인 수식어에 백제를 향한 창건주의 열망이 묻어난다. 극락보전으로 향하는 길에 ‘백제국의자대왕위혼비’를 보아도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역대 왕들의 한 맺힌 혼령을 위로하는 창건주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극락보전을 참배하고 나오는 길에 스님을 찾았다. 처소가 검소하고 단아하다. 먼저 온 젊은 보살들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낯선 객에게 아미타부처님 손길처럼 따뜻한 대추차를 내왔다. 스님은 아주 오랜 친구를 만나듯 맞아주었다. 나는 우선 창건주 최병식 박사 이야기를 꺼냈다.

스님은 ‘주류성’을 최병식 박사의 백제 역사 바로 찾기의 화두로 삼았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백제 유민들은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임존성에서 흑치상지와 복신이 이끌던 부흥군은 도침대사가 이끄는 주류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 통합하였다. 부흥군은 주류성에서 나당연합군을 크게 물리쳐서 빼앗겼던 수많은 성을 회복했다. 이때 복신과 도침대사가 근거지로 삼아 승리했던 주류성의 위치를 충남의 한산, 홍성, 전북의 부안이라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이곳 운주산성이나 여기서 얼마 되지 않는 비암사 부근의 연기가 가장 유력하다고 믿고 있다.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최병식 박사도 백제사에 설화처럼 전해지고 있는 마지막 항전지 주류성과 마지막 저항군 3천명이 몰살당한 삼천굴을 찾기 위해 일생을 바치고 있으며, 드디어 운주산성, 고려산성, 금이성으로 연결되는 이곳이 마지막 항전지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한다. 백제 부흥군의 영혼을 위로하는 아미타 불비상이 비암사나 연기 일대의 사찰에서만 발견되는 것만 봐도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해마다 고산사에서 백제고산대제를 개최해 의자왕과 백제 부흥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삼천굴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비운의 백제사를 바로 세워 밝히려고 20여년째 한 우물을 파온 것이다. 우리 고장 음성 출생이며 연배도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백제 유민과 부흥군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너무나 비극적이다. 죽음으로 최후를 맞은 3년여의 삶의 모습을 그려보면, 그들의 영혼이 1천300여년 세월을 넘어 운주산 골짜기마다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느낌이다. 이것이 바로 최병식 박사가 ‘백제의 마지막’을 안고 통곡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미타불비상이 발견된 비암사가 백제 멸망 직후 유민들이 창건한 절이라면, 고산사는 현대에 백제사 연구가인 최병식 박사가 창건한 절이다. 3년간이나 계속됐던 백제 부흥 항전 최후의 용사 3천명이 불에 타서 몰사했다는 삼천굴만 찾아내면 역사적 고증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 분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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