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칼럼]대화 불가능성
[오늘의 칼럼]대화 불가능성
  • 충청매일
  • 승인 2016.01.0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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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석 한국교통대산업경영공학과 교수

미국에서 9·11사태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온 국민에게 생중계되었다. 그것은 단지 현장에서 있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지켜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건국 이래 타국의 침략을 한 번도 받지 않았던 미국민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미국 내 범죄는 끊임이 없지만 최소한 국가적 안정성이라는 안정의 토대가 무너지는 사건이었다. 안정의 토대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근거리에서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후로 일어난 수차례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이나 보스턴 폭탄 테러와 같이 일상 속에서 느껴야만 하는 죽음의 위협은 사람들의 감각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집, 학교, 직장이 이러한 위협 앞에 전과 같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 위험이 존재하는 곳이 좀비라는 공포의 자극이 실제 공포가 되는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좀비가 다른 공포대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귀신이나 유령, 흡혈귀나 잔혹한 살인마와의 대화가 가능하다. 심지어 재난 영화의 공포의 대상인 자연도 그것의 발생 원리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대화가 가능하다. 그런데 좀비는 그러한 대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람은 좀비와의 관계 속에서 언제나 객체로 머물러야 한다. 그것에게 대해 완전히 무력한 존재, 언제나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위협이 된다.

인간은 대화 불가능한 대상을 상상의 존재로 환원시킨다. 인간은 자연을 신으로 섬겼다. 그것을 신이라는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유익과 해악을 동시에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좀비는 오직 대화불가능하며 동시에 위협적인 것에 대한 환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불가능성은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경제 규모가 세계화된 지금, 각 개인은 아무런 이유 없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것이 세계 전체 차원에서 해명된다 할지라도 각 개인이 그것을 이해할 수도, 그리고 거기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도 없는 객체에 불과하다.

죽음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에게 두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대화가 가능할 때 그 두려움은 경감이 가능하다.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러야할 때, 질병과의 대화가 가능하게 됐다. 자신이 무슨 이유로 죽음에 이르는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등 직접적인 대화는 아니지만 소통이 가능하다. 비록 쉽지 않은 일이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자동차사고와 같이 간작스럽게 닥치는 사고 또한 가능성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대화가 가능하다. 차에 올라타는 순간 안전하기를 소망함과 동시에 사고의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 기계적 결함이나 인간적 실수나 자연 재해로 인해서든지 간에 자동차에 탄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은 사고가 날 수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가 많이 남에도 불구하고 자동차가 공포의 존재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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