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석 시인

자고로 먹을 수 있는 것만 먹으라고 했다. 먹지 못할 것은 먹지 말라고 했다. 이 뻔한 삶의 이치를 유독 인간만이 잘 지키지 못한다고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첫 젖을 물리시며 소화시킬 수 있는 것들만 입에 넣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구별하는 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대로 입에 넣으려고 했다. 그래서 먹어서는 안 되는, 또는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집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화들짝 놀라시며 단호하게 제지하셨다. 아마 그것이 어머니께서 나에게 베푼 최초의 교육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먹는다는 것이 꼭 입에 넣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돈도 먹는 것이었고, 명예도 먹는 것이었고, 권력도 먹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욕망과 뿌리가 닿아 있었다. 욕망의 크기에 따라 얼마든지 그것들을 식탁에 불러올 수 있었다.

세상의 식탁이 풍성해질수록 식욕도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요리 방법에 따라 먹어도 되는 것들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의 경계가 모호하게 갈렸다. 대체적으로 힘 있는 자들의 요리 방법이 뛰어났다. 지지고 볶고 튀기고 졸이고…….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그들의 주방을 거쳐 나오면 모두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그들의 요리에 군침을 흘리던 우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앞다투어 그들의 요리 방법을 따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식욕만 앞섰을 뿐이지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요리 솜씨가 없었다. 타고난 사기술과 뻔뻔함이 바탕을 이루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채 요리되지 않은 먹을거리를 걸터듬다 탈이 나는 경우가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는 모두 그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어서 생긴 탈이겠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을 먹어도 되는 것들로 요리하는 솜씨가 부족한 탓으로도 볼 수 있다. 욕심껏 식재료를 끌어 모을 줄만 알았지 그것들은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둔갑시킬 수 있는 양념장의 비법이라든가 요리 순서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소화력이 식욕만큼 진화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식욕과 소화력의 부조화는 필연적으로 설사 혹은 변비 증상을 유발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증상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먹고 살다 보면 흔히 생기는 증상인데 무슨 호들갑을 그리 떠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이 증상이야말로 모든 병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 또한 요즘 들어 화장실 가는 횟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으니, 게다가 변기에 앉아 있는 시간도 자꾸만 길어지고 있으니……. 벌써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진리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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