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마지막 날, 아름다운 길 77번 해안도로(전남 해남군 북평면~땅끝 마을)

▲ 땅끝 탑.

무작정 떠난 여행 남은 것은 거창하지 않아

22일간 약 500km 완주 새로운 도전 두렵지 않아

 

드디어 마지막 날이다. 오늘 좀 바쁘게 걸으면 목적지인 해남에 도착한다. 아침부터 괜스레 신이나 늑장을 부렸다. ‘이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하는 마음과 ‘무언가 아쉬운 것들이 남아 있는데’하는 마음에 하루쯤 더 길 위에 있고 싶기도 했다.

배낭을 싸고 평소보다는 조금 늦게 숙소를 나왔다. 남해를 따라 이어진 77번 국도는 도로가 좁고 한적해 자동차도 적었다. 걷기에 최적의 도로라고 해야 하나. 바닷가를 따라 걷는데 남해바다의 분위기가 한껏 느껴진다. 해남 21km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북평면을 지나는데 작은 성당과 교회, 우체국이 보였다. 보통의 면단위 마을에 비해 마을 규모가 아주 작았다. 2차선 도로를 가운데 두고 그 주요 건물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걷다 허기가 져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작아보였던 구멍가게는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넓고 물건들도 많았다. 아마 이 동네의 생필품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배낭을 메고 걸어온 젊은 여학생을 보고 동네 어르신들이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간식거리를 집어 들고 나오려는데, 한 아저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학생이냐고 물으셨다. 서울에 있었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길 위에서는 작은 질문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하루의 즐거움을 채워주는 작은 행복이다.

아저씨의 따님도 대학생 때 도보여행을 했다고 한다. 한국은 아니었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 나 역시 언젠가 가보고 싶은 여행지이다. 아저씨는 한국의 열악한 도로사정에 대해 토로하면서 해남까지 무사히 가기를 바란다고 격려해주시면서 “이렇게 도보여행을 하는 학생들이 더 많아져야 하지만 그런 학생들을 환영해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하니 안타깝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아저씨의 생각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 많은 어른들이 도보여행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도보여행을 하고 싶어도 시간과 돈 문제에 얽매여 엄두도 내지 못한다. 지역마다 도보 여행자들의 쉼터 같은 것이 있다면 훨씬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국토도보여행을 할 수 있겠다는 아저씨의 생각에 절대적으로 공감했다. 내가 조금은 무모한 것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저질렀으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마을 담장들이 돌로 쌓아 있어 정겨워 보였다. 마치 제주도 마을 담장들처럼. 자연을 이용한 바람막이용 돌담 집. 집 안도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실례이기 때문에 생략했다. 땅 끝 마을과 가까워질 무렵 한 마을 입구가 발길을 잡았다. 이 마을을 둘러본다면 목적지에 늦어질 수 있지만 오늘이 아니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한 바퀴만 둘러보기로 했다. 아주머니들이 농산물을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다 바닷가도 발견했다. 모래사장에 낙서도 하고 혼자 이 마을을 염탐하는 기분이라 너무나도 설레었다. 마을을 돌다가 오래된 우물을 발견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물인지, 물속은 너무나도 더러웠고 깊어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아찔했다. 빠진다면 아무도 모를 정도로 깊은 우물이었다. 우물터 풍경은 마치 마을사람들에게 만남의 장소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물터에서 만나요...” 실없는 생각들을 하다 시간을 보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있어 빠르게 77번 국도로 되돌아갔다. 

구경하고 싶은 마을이 많이 스쳐 지나갔지만 오늘은 여행을 끝내야했다. 모든 유혹들을 떨쳐버리고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도로위에서 만나는 행인들은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이 대부분인데 오늘은 저 멀리 도로 끝에서 힘차게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동네사람은 아니었다. 걷는 모습이 힘찼다. 본능적으로 그 사람도 여행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궁금한 감정을 숨기기 힘들었다. 자전거가 아닌 도보로 여행하는 사람은 만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내 모습을 보고 반가웠던지 웃으면서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나눴다. 그 사람이 “여행 중이냐”고 물었고 “오늘 해남을 마지막으로 끝나요”라고 하자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저는 오늘 시작해서 서울로 올라가려고요”라고 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온 길을 가는 사람. 거꾸로 가지만 그 벅참을 느끼는 또 다른 사람이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고 놀라웠다. 내가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생각이 났다. 의욕과 기대가 가득했던. “여자분 혼자 대단하다”면서 함박웃음을 지어주는 여행 후배에게 서울까지 꼭 무사히 도착하시라는 말과 함께 내 갈 길을 재촉했다. 걷는 동안 동행자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마지막 날 같은 마음으로 여행을 나서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신기했다. 

땅 끝 마을을 알리는 비석에서 한 부부를 만났다. 부모님 또래의 그 분들은 내가 인사하자 같이 밥을 먹자고 하셨다. 돗자리를 깔고 식사를 하고 계셨다. 두 분은 suv를 타고 한국을 여행 중이라고 하셨다. 자식들은 모두 취직을 했거나 결혼을 했고 이제는 여행을 하고 싶어 이렇게 길 위에서 생활한지 벌써 2주째라고. 나이가 들어 나처럼 걸어 다니고 싶어도 그것은 힘들다고 하셨다. 버너에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너무나 맛있었다. 마지막 날 나를 위한 만찬인 것 같아 경건하게 먹었다. 서로 좋은 여행이 되자고 작별인사를 하고 땅 끝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어스름해질 무렵 전망대에 도착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쉬는데 바다의 냄새가 가슴 깊이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결국 해냈다. 22일 동안 약 500km를 걸었다.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전망대 모습이 타이타닉호의 뱃머리 같았다.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이제 집으로 돌아 갈 시간이었다.

땅 끝 마을 풍경은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상업적인 공간으로 변해버린 모습. 하지만 상관없었다. 걷는 여정이 너무나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루 더 머물까 했지만 데리러 와준 아빠의 차를 타고 청주 집으로 가기로 했다. 22일 걸어온 길을 단 3시간 만에 차를 타고 집으로 오니 허무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이틀을 앓기도 했다.

거창한 꿈을 찾고자 떠난 여행도 아니었고, 무엇인가를 얻고자 떠난 여행도 아니었다. 그냥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여행 끝에 무엇이 남았나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거창하지 않다. 그저 세상은 생각보다 넓다는 것과 여행 보다 힘들 일은 수두룩하다는 것. 그동안 내가 생각하던 걱정들은 사실 별것 아니었다는 것. 이 세상에 쓸데없는 도전은 하나도 없다는 것. 눈에 보이는 결과는 없지만 나만 알고 있는 무언가가 내 안에 남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에서 르윈 데이비스는 무일푼의 뮤지션이다. 동료의 자살로 무너진 인생에서 꿈을 찾아 길 위로 나선다. 음악으로 성공하고 싶은 르윈은 결과가 어떻게 되던 길 위에서 죽던지 꿈을 찾던지 하자 하는 심정으로 여행자가 된다. 이곳저곳에서 얹혀살며 자신을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뮤지션으로서의 삶이 성공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사실 그는 음악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기도 한다. 영화에 고양이가 나오는 데, 르윈이 방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장치로 이용되기도 한다. 단순히 바라만 보았을 때는 음악영화로 볼 수도 있지만, 길 위에서의 방황을 통해 자신을 알고자 하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담은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인사이드 르윈’속의 주인공이 내 모습과도 겹쳐진다. 분명 거창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자아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라던가 하는, 꿈에 대한 확신이라던가)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그런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깊은 생각은 남는다. 이 모든 질문과 문제들이 평생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단지 이번 여행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의 소망이나 목적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또 다른 목적이 생긴다는 것. 그렇게 무엇인가에 도전하는 것은(성취하든지, 실패하든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도전에 대한 자신감이 여행에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끝)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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