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광 섭 <성동교회 목사> jang0691@chol.com

4월11일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최대의 명절인 부활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절기이다. 유럽이나 캐나다, 미국과 같은 나라들에서는 부활절 휴가가 있어서 고향의 가족들과 함께 부활절을 지내기도 한다.

부활절은 해마다 그 날자가 변경된다. 그 이유는 춘분이 지난 첫 만월(음력 보름)이 지난주일(일요일) 날을 부활주일로 지키기 때문이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뤄진 사실이지만 그 사실은 자연현상 속에서도 나타난다. 만물을 숙고해 보고 또 피조계에 나타나는 다양한 자연의 과정을 관찰하면 부활의 가능성은 더 짙게 나타난다.

부활에 달하는 변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스물 네 시간의 공간을 잘 살펴보면 이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낮은 밤 속으로 죽어가고 정적과 어두움 속으로 묻혔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또다시 살아나 어두움의 무덤을 열고 죽음의 밤을 헤치고 솟아난다. 이것은 매일의 부활이다. 낮이 밤을 향해 죽어가듯이, 여름은 겨울 속으로 죽어간다.

겨울에는 식물의 즙이 뿌리로 내려가서 그 곳에 묻혀 있다고 한다. 대지는 눈이나 서릿발로 뒤덮여 무덤이나 다를 바 없다. 시베리아 지역은 겨울에 섭씨 영하 40~50도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도 나무는 겨울 동안 얼어붙었다가 봄이면 만물은 소생하기 시작한다.

수목과 꽃들이 그들의 무덤 밖을 기웃거리다가 소생하며 성장해서 우거진다. 이것이 해마다의 부활이다. 우리는 곡식을 먹고살며 그 곡식이 없으면 굶어 죽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씨앗을 대지에 던져 흙속에 묻으면서 그것이 썩어서 싹이 나고 무성해지기를 바란다.

이와 같이 반복되는 경험에 의해 우리의 몸은 계속해서 자양분을 섭취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활의 성공에 의해 삶을 유지해 간다. 그러므로 만물은 부패에 의해 회복되고 멸망에 의해 보존되며 죽음에 의해 소생된다.

‘이와 같이 만물은 사람을 위해 죽고 또다시 소생하는데, 그 만물의 주인이 죽음에 갇혀 살 수 없다면 이것이 과연 옳은 생각일까? 창조 주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만물을 소생시켜 주시는데, 하나님을 위해 사람을 소생시키시지 않을까?

다른 이론은 접어 두고 인간 본성의 원리와 자유의 원리, 인간 행동보상성의 원리, 자연 변혁의 원리, 기타 피조물의 원리를 생각해 보면 우리 몸의 부활의 가능성은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고 믿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이며 교훈이다.

인간 육체의 부활, 즉 그 몸이 무덤 속의 황폐와 부패와 망각으로부터 생명으로 되돌아오는 회생(回生)은 초자연적인 사실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한숨 짓는 입술을 다물며 공허를 메꾸고 절망을 거둬 버린다. 이들은 소망의 새벽별을 가지고 무덤의 흑암을 밝히며, 낮과 같은 부활의 광택으로써 무덤의 밤을 향해 비춘다. 믿음은 불신과 회의와 절망에게 묻는다.

“왜 당신은 하나님께서 죽은자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의심하는가?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있겠는가?” 믿음은 또 말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믿음은 죽음을 슬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외친다. “너희 죽은자들이 다시 살아나리라” 기독교는 불가지론이 아니라 확신과 지식이며,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기독교는 이성주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를 향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계시 중에서 두드러지며 중요한 항목은 부활이다. 4월은 생명이 솟아오르고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움 계절이다. 우리나라 전반에 걸친 모든 삶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어수선한 정치계와 사회 전반에 걸친 각 분야에서 밝고 아름다운 생명의 약동과 아름다운 사회로 솟아나고 꽃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부활의 계절에 바라는 우리 국민들의 바라는 큰 소원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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