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석 시인

세면을 마친 딸이 화장대 앞에 앉는다. 셋째 딸이다. 세 딸 중에서 가장 미용에 관심이 많은 딸이다. 그럴 만도 하다. 이제 마악 스물의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이니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쁘다. 그냥 봐도 예쁜데 화장을 하니 더욱 예쁘다. 그런 예쁜 딸이 화장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행복이다. 이건 딸을 가진 부모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셋째 딸의 화장은 순차적이면서도 꼼꼼하다. 그런 화장 습관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필이면 아르바이트로 한 일이 화장품 판매였던 것이다. 아마 거기서 셋째 딸은 화장품의 종류와 기능, 그리고 효과적인 화장 방법 등을 터득했던 모양이다.

아침은 출근 시간이다. 너도 나도 모두 바쁘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화장대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셋째 딸의 화장 시간은 길다. 당연히 채근이 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강제로 끌어낼 수도 없다. 이미 시작한 화장을 중도에서 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가끔은 아주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곤 한다. 화장대 앞에 한 명은 앉고, 한 명은 서고, 그리고 또 한 명은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허리를 굽혀 화장을 하는, 마치 아크로바트를 하는 곡예사들처럼 보이는 장면이 그것이다. 당사자들도 그 모습이 우스운지 키들키들 웃는다. 나도 웃는다. 재미있다. 행복하다. 어디 가서 이런 모습을 보랴. 한 거울 앞에서 아름다운(?) 네명의 여자가 한꺼번에 화장하는 모습을 누가 감히 볼 수 있으랴.

오늘도 어김없이 화장 욕심이 많은 셋째 딸이 가장 먼저 화장대에 앉는다. 세수를 갓 마친 얼굴이 발그레하니 싱그럽다. 엷은 김이 서리기도 한다.

“딸아, 너무 진하게 화장하지 마라. 요즘 여자들 어디 민낯을 알겠더냐?” 멋쩍음을 벗어나기 위해 한 말이지만, 사실 나는 평소에 여자들의 진한 화장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남자나 여자나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화장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볼 수도 있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절대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가꿀 수 없다. 겉모습을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도 아름답게 가꿀 줄 안다. 그러므로 여자든 남자든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가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화장도 적당히 해야지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보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도 있다. 덕지덕지 덧칠을 하여 민낯을 모르게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화장이 아니다. 그래서 셋째 딸에게 슬쩍 그렇게 말한 것인데, 되받아치는 셋째 딸의 말이 절창이다.

“아빠야, 오해하지 마시라. 진정한 화장이란, 못난 것은 못난 대로, 잘난 것은 잘난 대로 소중히 가꾸는 일이지 못난 것을 잘난 것처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이 아니야.” 오호라! 화장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구나. 화장이란, 있는 그대로를 소중히 가꾸는 것이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억지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는 말,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반백년을 넘어 산 나의 생애는 가꿈일까, 꾸밈일까? 잠시, 셋째 딸 등 뒤에 가만히 앉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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