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상가에서 조 선생을 만났다. 상가가 아니면, 요즘은 남의 집 큰일을 가도 마땅히 앉아 이야기할 곳이 없다. 사람이 살면서 여러 대소사를 치르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큰일은 혼사와 상사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결혼예식은 이미 오래 전 축의금을 내고 밥만 먹는 식당으로 전락했다. 예전에는 신랑신부와 그 가족들이 친척이나 하객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정담을 나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광경은 옛일을 그리워하는 노인들의 구전으로나 들을 수 있는 희한한 세상이 되었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널찍한 식당에는 그날 혼사를 치르는 집안들의 모든 하객들이 한데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고, 오랜만에 만난 가까운 일가들조차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는커녕 당장 음식 먹을 자리도 잡지 못해 접시를 들고 헤매야 한다. 내 집에 온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아니라 밥 얻어먹으러 온 걸뱅이처럼 천대를 하는 것이다. 서로 덕담을 나누고 축하를 하는 자리가 아니라 축하금을 받고 그 대가로 밥 한 끼 해결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그래도 상가는 아직 예전의 예법이 조금은 남아있어 퍼질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곳에서 조 모 선생을 만났다. 조 선생은 작은 면소재지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얼마 전, 선생의 이야기가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 선생이었지만,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방송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조 선생이 교직에 발을 디뎠던 아주 오래 전 자신의 반 아이들과 약속을 했단다. “앞으로 이십 년 후 광복절 날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리고 만났다. 까까머리 녀석들은 삼십대 중년의 나이가 되었고, 선생 역시 그만큼의 세월을 먹었다. 그런대도 기분은 예전과 똑같더란다. 이십년 전 추억이 어린 교실에서 간단한 행사를 마친 후 선생의 시골집으로 자리를 옮겨 텃밭에 심은 감자와 옥수수를 꺾어 쪄먹으며 이런저런 정담을 나누며 하루를 보냈단다.

그런데 그날 모인 20여명의 제자 중 절반 이상이 결혼을 하지 않았더란다. 서른다섯 정도면 남자도 여자도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긴 나이였다. 그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들어보니 대체로 경제적인 문제라던 것이었다. 자의에 따라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요즘 이 땅에 사는 젊은이들이 안쓰럽고 불쌍하다. 우리 기성세대가 겪었던 그 시절보다 현재 젊은이들이 겪어내고 있는 지금이 훨씬 더 어려워 보인다. 아니 어려움을 넘어 고통스럽다. 희망이라도 보이면 고통도 견뎌내겠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고통은 배가되어 젊은이들을 절망에 빠뜨린다.

학자금 대출, 취업, 인턴, 비정규직, 정규직이 되었다 해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 속에서 결혼은 사치일 뿐이다. 당장 자신의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결혼은 꿈같은 이야기다. 한껏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할 젊은이들이 꿈도 펼치기 전에 현실에 발목을 잡혀 체념하거나 절망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가 인다. 요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절망은 그들 잘못이 아니라 우리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한국의 미래 자산들이 펴기도 전에 사라지고 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희망을 품고 맘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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