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드넓은 모래사장이었던 모래내 장터(충북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

▲ 홍수를 막기 위해 축조된 덕정저수지. 저수지 물은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덕정저수지에 고인 물, 생명력 잃어

모래내 하천 지형 변해 취락지구로

삼성면소재지서 다시 미호천 오염

 

마이산에서 내려온 물길은 충북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덕정골 동리천을 따라 덕정리 덕정저수지(모란지)로 흘러들었다 삼성면 덕정리 모래내를 지나 미호천을 형성한다. 덕정저수지로 흘러들기 전까지만 해도 작은 실개천 같았던 미호천 상류가 덕정저수지를 기점으로 하천 폭이 넓어지는데 수십 년 전에는 현재의 모습 보다 훨씬 넓었다고 한다.

동리천을 따라 덕정저수지로 가는 길은 농로길에 풀숲을 헤치며 가야 한다. 동리천 둑에 난 아카시아 나무와 온갖 넝쿨 식물 때문에 하천가로 접근하기 어려운 코스다. 풀숲 우거진 농로를 벗어나면 도치천과 합류해 작은 실개천을 이루는 물길이 덕정저수지로 유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쯤 되면 비로소 우거진 덤불숲을 벗어나게 되는데 이쯤에서 맨살처럼 드러난 온전한 실개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덕정저수지로 유입되는 실개천은 마을과 떨어져 있고 주변이 오통 논뿐이어서 인지 양덕리 마을 동리천에서 본 생활폐수 유입이나 하천 정비공사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가뭄 때문에 소량의 물만 흐르고 있지만 실개천다웠다. 

문제는 덕정 저수지에 고여 있는 물이다. 7월 초순 비가 올 기미가 없는 무더운 날씨에 찾은 덕정저수지는 심한 녹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저수지는 온통 마름이 뒤덮고 있었고 저수지 가장자리에는 붕어와 말조개 등이 폐사해 있을 만큼 심하게 오염돼 있었다.

심한 가뭄에 덕정저수지 물이 수위가 낮아져 흐르지 못하고 고여만 있는데다 낚시터로 이용되고 있어 물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1944년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덕정저수지 물은 삼성면 덕정리를 관통하며 삼성면 일대의 농업용수로 사용되는데 저수지가 축조된 이유는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에 빈번한 홍수를 막기 위함이었다. 덕정저수지 아래를 윗말 모래내라고 하는데 현재의 덕정리 일대가 커다란 모래백사장이었고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는 모래내가 물에 잠길 만큼 수량이 풍부했다는 것.

덕정리 모래내에서 태어나 평생을 산 문부근(77)씨 등 마을 어른들의 증언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했지만 어린 시절만 해도 이곳은 물길이 넓고 깊어 넓은 모래사장이었지. 우물을 팔 때 120m 깊이로 관정을 박아도 모래가 나올 정도로 모래가 많은 동네여. 물고기며 조개며 자라를 잡아먹었지. 삼성시장이 모래내 아랫말여. 옛날에는 모래내 장터라고 불렀지. 여기가 다 모래밭이었어. 지금은 양쪽으로 제방을 만들어 하천이 작아졌고 물도 예전만큼 흘러내리지 않어. 마이산 미호천 발원지 샘에서 콩나물을 씻으면 모래내 윗말까지 내려온다고 했어. 그만큼 물길이 대단했지. 대홍수가 몇 차례 있었지. 그러다 덕정저수지가 생긴 이후로 홍수를 막을 수 있었던 거여. 저기가 일정시대 때 주재소가 있었던 자리여. 옛날 생각하면 모래내가 너무 많이 변했어.”

넓은 모래벌판이었고 한여름이면 홍수가 날 만큼 수량이 많았던 하천 폭이 덕정저수지 건설로 폭이 좁은 하천으로 변한 셈이다. 과거 모래내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고 지금은 모래내라는 지명만 남아 윗말과 아랫말 시장 사이에 삼성 명지 아파트, 상민빌라, 명성연립 등 주택이 많이 들어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

모래내라는 지명이 생기는 이유는 상류지역의 토양침식이 극심해 비가 내릴 때마다 토사가 유실돼 하상(河床)에 퇴적층을 형성하면서 하상의 높이가 주위의 평지보다 높아지면서 생기는 하천이다. 이런 모래내를 천정천(天井川)이라 부르는데 홍수의 위험이 크고 대개 산지에서 평지로 흘러내리는 작은 하천에서 나타나며, 갈수기에는 건천(乾川)을 이룬다. 이러한 하천은 자주 범람이 발생해 이를 막기 위해 양안에 제방을 쌓는데 제방이 없을 경우 하천은 홍수가 날 때마다 유로를 변경하여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된다. 물길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게 모래내의 특징이다.

덕정리 모래내가 전형적인 천정천이었던 것이다. 하늘이 내린 우물과 같은 모래내는 산업의 발달로 저수지를 건설하면서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드넓은 모래벌판은 사람들을 위한 도시화가 된 셈이다. 비록 모래내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모래내의 전설을 품고 있는 덕정리는 덕지(德地)리의 덕(德)자와 금정(金井)의 정(井)자를 따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덕정리는  충주군 지내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정리·덕고개지리·가동리·가서리를 병합해 삼성면에 편입되었다.

양덕리에서는 동리천 물길과 다른 사람의 길이 나있어 덕정저수지를 끼고 도는 모래내고개를 넘으면 덕정리로 이어진다.

덕정리는 삼성면 소재지 중심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사창리, 북쪽으로 대정리, 서쪽으로 양덕리와 접하고 있다. 덕정리는 모래내, 금정, 방죽김정, 사천, 골가실, 윗말, 새터, 방죽가래실, 별무늬 아파트 등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모래내 북서쪽에는 절터가 있는 용뎅이들, 장터의 북서쪽에는 배련골들, 남쪽에는 비룡들, 서남쪽에는 오공가리들, 동남쪽에는 갱기들 등이 있다. 갱기들 북서쪽에는 고창미들이 있고 오공거리 남쪽의 상나무들, 새터 남쪽의 길번득이들 그리고 새터 앞의 철유골들 등의 들이 있어 벼농사를 위주로 한 드넓은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1905년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에 큰 범절을 보인 하석환(河碩煥)을 기리기 위해 1963년 음성군수 유용기의 주선으로 세운 효의비(孝義碑)가 있다. 가래실에는 지내면터가 있다.

음성의 구비문학(2005년)에 금정마을의 유래가 된 금정샘(춘천샘)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말엽에 전라도 정읍 목사 조씨라는 사람이 한양 가는 도중에 이 마을을 지나다 목이 말라 샘물을 마셔보니 물맛이 기막히게 좋아 금(金)속에서 나오는 물(井)이라 하여 금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가뭄이 극심한 어느 해에 춘천이란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 주민들이 식수난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샘터를 지적해서 우물을 팠다하여 노승의 이름을 따 춘첨샘이라고도 부르는 샘이 있다.

모래가 많아 우물사용이 쉽지 않았던 덕정리 환경에서 주민들에게 샘의 존재는 귀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설이 와전되어 모래내에서 금을 캐기도 했다는 설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현재 덕정리에는 모래내가 있었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생존해 있는 노인들을 통해서만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아파트 옆으로 흐르는 미호천 상류 동리천은 사람들 곁에서 제 모습을 잃고 다시 시멘트로 둘러싸여 있다. 동리천이 덕정 저수지를 지나 삼성면을 관통하는 동안 다시 생활하수와 공장 폐수, 축산폐수 등이 하천으로 무자비하게 유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삼성면의 하수종말 처리시설이 제대로 안 돼 있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김정애기자(취재지원 미호천 지킴이 전숙자·임한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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