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십팔일째, 용궁 속을 걷다 (광주시~전남 나주시)

▲ 비가 내리고 우중충했지만 장화와 우산으로 스타일을 뽐내느라 즐거웠다.

작은 물건도 짐이 되는 고된 걷기

우산·장화가 비로부터 지켜준다

추위·다리 통증 등 험난한 하루

포기하지 않았기에 목적지에 도착

 

북적거렸던 광주시의 밤은 아침이 되니 한적하고 스산하다. 다들 출근 때문인가 생각해 보았는데 일요일이었다. 찜질방을 나서는데 아침부터 목욕하러 오는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아침의 느낌이 화창하기 보다는 우중충한 잿빛 분위기에 어쩌면 비가 오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층으로 내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여행을 하는 중에 나를 괴롭히는 가장 큰 두 존재는 비와 추위였다. 오늘은 그 둘이 동시에 나를 괴롭힐 것 같다. 광주에 오기 전 들고 다니기 힘들어 버려버린 우산이 생각났다. 숙소에서 주인아저씨가 들고 가라며 챙겨주었던 투명한 우산이었는데, 비록 낡았지만 그 마저도 그리웠다.

비를 맞으며 갈 수 없어 근처 문방구에 들려 튼튼해 보이는 보라색 우산을 구매했다. 우산 하나를 사는 순간에도 굉장히 많은 고민이 있었다. 비가 그친 후를 생각하면 긴 우산은 들고 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접이식을 사 가방에 넣자니 비를 막아주기 힘들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비는 또 올 수 있고 지팡이처럼 짚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긴 우산을 집어 들었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우산이다. 서울에 올라가더라도 쓰고 다니겠다고 생각하며 크고 긴 우산을 선택했다. 짐을 늘리는 것 자체가 고통인 나로서는 이렇게 우산을 하나 사는데도 고민을 충분히 해야 했다. 

며칠 전부터 아려오던 허벅지가 점점 더 아파온다. 기찻길을 건너고 나서 바로 앞에 있는 약국에 들어갔다. 파스를 몇 개 구입하고 화장실을 빌려 들어갔다. 화장실 보다는 창고에 가깝던 화장실이다. 오래된 약들이 쌓여있었다. 약국 뒷골목의 느낌이 특별했다. 팔리지 않은 약상자가 쌓여 포근한 집과 같은 공간이다.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버텨보았는데 그 새 다리가 상한 것인지, 파스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빗속에서 아픈 다리를 끌고 걷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어느새 광주시를 벗어나 외곽 도로로 들어섰다. 이제 부터는 사람 하나 보기 힘든 길의 연속이 될 것이다.

비가 아침보다 점점 거세져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운동화마저 구멍이 나 틈새로 물이 자꾸만 차올랐다. 장화가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다. 마을을 지나다 장화를 사기 위해 하나로 마트가 있어 바로 들어갔다. 농사지을 때 쓰는 거대한 비닐장화밖에 없었다. 그 장화로는 장시간 길 위에서 도저히 신고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다른 상가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 광주시 시장으로 갔다.

무릎아래까지 오는 장화를 사 신고 버스를 타고 갔던 그 자리로 돌아왔다. 뜻밖의 비가 선물해준 번거로움이었다. 비와 다리 통증이 겹쳐 짜증이 났지만 저렴한 시장 장화에 보라색 우산의 조화가 어딘지 모르게 재밌고 마음에 들어 그냥 웃어넘기기로 했다. 조금 지체 됐으니 부지런히 걸어야 나주시에 도착할 것이다.

장화덕분에 어떻게든 피해 걸었던 물웅덩이를 힘차게 밟을 수 있어 좋았다. 지도가 안내하는 길 옆쪽으로 지름길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도를 확대해 보니 초등학교도 있고 마을도 있는 길이었다. 주저 없이 언덕길을 올랐다. 한참을 걸었더니 작은 마을 사이로 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물었다. 분명 집들은 많고 초등학교도 보이는데 산길처럼 숲이 무성하고 사람은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길 오른쪽으로 무덤들이 보였고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데다 안개가 짙어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마을은 폐허와 같았고 여러 기의 무덤까지. 깊은 산길에 나 혼자 있는 것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망망대해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 왔다. 물 속 용궁 같기도 한 곳에서 오직 혼자만 길을 걷고 있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을 벗어나기 위해 줄곧 내리 달렸다.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달리니 문 닫힌 중학교와 구멍가게가 나타났다. 그제 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감독 이안)>에서 파이(슈라즈 사르마)가 바다에서 표류됐을 때 느꼈던 그런 감정들이 지금의 내가 갖고 있는 기분과 비슷할까? 파이의 공포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와 닿았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는 호랑이와 파이의 영웅담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사람이 혼자서 거대한 정적과 고립을 이겨내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과의 사투를 그린 것이다. 영상미가 뛰어난 재미있는 영화를 넘어 홀로서기에 필요한, 홀로서기를 감행하는 나 같은 사람을 응원하는 영화다. 무서움과 추위와 다리 아픔…, 여러 가지를 참아야 했던 길고 긴 하루였다. 결국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나주시에 들어설 수 있었다.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