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불식여(狗不食餘).

요즘 며칠째 이 말을 곱씹고 있다. 며칠 전, 절친하게 지내던 어떤 분을 만나 담소를 나누다 논쟁이 붙었다. 좀처럼 없던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토론도 귀찮고 논쟁도 귀찮았다. 내 생각만 옳고 상대방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하던 한 때는 싸움도 참 많이 했다. 내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니 상대방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래서 토론으로 시작했던 것이 논쟁으로 비화하며 즐거웠던 판이 깨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상대방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를 수도 있음을 느끼며 나의 무모함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부터 전처럼 내 주장을 고집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일상사로 시작해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잡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위의 사자성어가 나왔고, 그 풀이를 하다 그 분이 ‘요즘 세상에 정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냐’며 비웃었다. 세상이 모두 썩었는데 정의로움을 논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그 말이 내 귀에는 너무나 거슬렸다. 그래서 곧바로 논쟁에 빠져들었다. 나는  세상이 다 썩었으니 그냥저냥 휩쓸리며 그럭저럭 살자는 얘기냐, 세상이 다 썩었으니 같이 썩은 것처럼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냐며 반문했다. 만약 그 분이 평소에도 그런 소신으로 살던 분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누구 못지않게 분별력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던 분이셨다. 그래서 내 귀에 더 거슬렀는지 모른다. 그래서 마구 논쟁을 벌였었다.

문득 광주에 계신 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 목사님이 떠오른다. 평생을 노동자·농민·억울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하소연을 받아주며 사셨던 분이다. 정 목사님께서 생전에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하나에서 열까지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싫고, 당장이라도 천지개벽을 해 꼴 보기 싫은 모든 것들을 말끔하게 쓸어버렸으면 좋겠다며 울분에 떨던 때였다.

“목사님! 세상이 온통 다 썩었는데, 어째 망하지 않는 건가요?”

내 물음에 목사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사람들은 세상이 온통 다 썩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방에서 똥냄새가 진동하는데 어째서 이 더러운 세상이 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똥통 같은 세상 속에서도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맑은 물을 품어내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님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번개를 맞은 듯 전율을 느꼈다. 나는 세상을 살며 똥을 뿌리는 사람일까, 아니면 맑은 물로 세상의 더러움을 희석시키는 존재일까. 세상에서 나만 홀로 청청하고 나만 홀로 꼿꼿하다고 자만하며 세상을 저주하던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 세상과 사람들을 원망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는 동안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며칠 전 절친했던 분과의 논쟁은 나로 하여금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구불식여(狗不食餘). “불의의 사람이 먹다 남은 밥은 개도 먹지 않는다.”

섬뜩하다. 나 역시 개도 먹지 않는 밥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분을 논박할 정도로 나는 정말 정의롭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한 가지만은 단언한다. 내 생각이 온전한 이상 절대로 그런 밥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설사 아사한다 하더라도 아사로 세상에 남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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