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십사일 째, 음식으로 나누는 특별한 정(김제시 금구면~전북 정읍시)

▲ 소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아주머니가 싸준 파프리카를 줘 봤지만 먹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하루 하루 삶의 의미를 쌓아간다

그것이 먹을 것과 연관 되면 더욱

따뜻하게 가슴에 남음을 경험한다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김제시 금구면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하루 걸었던 코스 중 가장 짧은 구간이다. 한옥마을에서 더 놀고 싶은 욕심을 접고 오후에 부지런히 걸어 겨우 도착한 곳이다. 금구면은 시골이나 다름없어 작은 마트 하나 찾는 것도 힘들었다. 모텔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이튿날은 일찍 일어났다. 전날 적게 걸었기 때문에 오늘은 세게 걸을 계획이다. 금구면에서 전북 정읍시까지의 거리는 대략 30km다. 아침을 일찍 먹고 출발할 참이었다. 그런데 아침을 파는 식당이 있을지 걱정되었다. 사람들이 드물어 손님이 없을 것 같은 마을에 아침장사를 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운 좋게 묵었던 숙소 바로 옆에 식당이 있었다. 겉모습으로 봐서는 술과 안주가 주 메뉴인 것 같았다.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아침식사가 되냐고 물었다.

식당은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맛좋은 안주를 내놓는 술집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매운탕이니 아구찜 같은 메뉴가 대부분인 데서 아침식사를 먹겠다고 한 것이 오히려 미안했다. 아주머니는 혼자 배낭을 메고 들어선 내 차림새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주머니가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혼자 걸어오는 동안 많은 어른들이 관심을 보여줬고 비슷한 대화를 반복해서 나누기도 했다. 금구면까지 걸어오게 된 계기와 주변사람들의 응원, 가족들의 지원 등을 얘기하니 “여학생이 혼자서 대단하네”라는 말을 하셨다.

식당에는 부부 이외에 따님이 한분 더 계셨다. 그 딸이 이번 달에 결혼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가족들이 벌써부터 잔치 집처럼 즐거운 분위기였다. 가족들의 즐거운 분위기가 내게도 전달된 것처럼 나도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주인 내외분은 집에 찾아온 손님 대하듯 나를 정성스럽게 챙겨주었다. 지나가다 들른 식당 손님이 아니라 마치 그 집안의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나도 신이나 언니에게 누구와 결혼하는지, 기분이 어떤지 시시콜콜 묻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길을 나섰다.

그런 내게 아주머니는 정읍에 도착하기 전까지 먹을 곳이 마땅치 않을 거라며 이것 저것 챙겨주셨다. 마침 전날 집안에 제사가 있었다며 제사지내고 남은 배와 파프리카를 싸 주었다.   “걷다보면 얼마나 목이 마르겠어? 갈증 날 때 파프리카를 먹어.”

귤까지 담아주시려는 걸 아무래도 가방이 많이 무거워 질 것 같아 거절했다.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죄송스러웠지만 할 수 없었다. 주는 대로 받았다 하루 종일 배낭의 무게 때문에 힘겨워 했던 적이 있다. 천안에서 필순 이모 집에서 머물고 이모가 챙겨주었던 음식의 무게를 잊을 수 없었다.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마음이 담긴 음식의 무게. 어깨는 무겁지만 그 만큼 하루도 기분 좋게 묵직해진 느낌을 기억한다.

하지만 거리로 나가 걷기 시작하면 등이 무거워져 도저히 버릴 수도 없고 다 먹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의 무게이기도 하다. 억지로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어 길에서 마주치는 길동무들(강아지나 고양이)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마침 금구면을 벗어나는 길에 한우를 키우는 축사를 만났다. 원래 소를 좋아해 축사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안으로 들어가 소잔등을 한번쯤 쓰다듬어 줘야 직성이 풀린다. 오늘도 축사로 들어갔다. 그렁그렁한 소의 눈망울을 보면서 뭔가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배낭에서 파프리카를 꺼냈다. 내가 한입 베물며 소에게도 내밀었지만 파프리카 특유의 향 때문일까? 소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른 소에게도 똑같이 했지만 소들은 파프리카를 먹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혼자 파프리카를 먹으며 소의 눈만 쳐다보았다. 축사에서 바로 자리를 뜰 수 없을 만큼 소들이 좋았다. 소들을 보면서 아침을 먹은 식당 식구들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금구면을 떠나는 것이 그분들과 진짜 이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정을 나누다 이별하는 것이 매번 힘들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했던 그분들도 내게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날씨가 며칠 연속해서 흐렸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울적해 지곤 했지만 금구면에서 출발한  발걸음은 날씨와 달랐다. 마음은 화창했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그 공간은 특별한 공간이 된다. 아침을 먹은 식당이 그랬다.

금구면 식당은 핀란드의 카모메식당을 떠올리게 한다. 고요하고 조용한 핀란드에서 일본 식당을 하게 된 세 일본여자에 관한 영화 <카모메 식당(감독 오기가미 나오코)>이다. 인도 여행 중에 여러 번 봤던 영화다.

핀란드 헬싱키라는 도시의 길모퉁이에 새로 생긴 카모메 식당. 이곳은 야무진 일본인 여성 사치에(고바야시사토미)가 경영하는 조그만 일식당이다. 주먹밥을 대표 메뉴로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지만 한 달 째 파리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다. 그래도 꿋꿋이 매일 아침 음식 준비를 하는 그녀에게 언제쯤 손님이 찾아올까?

일본만화 광인 토미가 첫 손님으로 찾아와 대뜸 일본 TV에 방영됐던 만화 ‘독수리 오형제’의 주제가를 묻는다. 손님이 왔다는 사실에 좋기만 한 사치에는 ‘독수리 오형제’ 주제가를 알기 위해 도서관을 갔다가 눈을 감고 세계지도를 손가락으로 찍은 곳이 핀란드여서 이곳까지 왔다는 미도리(가타기리 하이리)를 만난다. 이들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함께 카모메 식당을 운영하게 되는데 또 다른 일본 여행자 마사코까지 합류하면서 카모메 식당은 손님들로 활기를 더해간다. 사치에의 맛깔스런 음식과 함께 식당을 둘러싼 사람들의 사연이 하나둘 밝혀지는 에피소드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이면서 비슷한 무게로 감동을 주는 영화다.

낯선 이방인을 싫어하는 핀란드 사람들 사이에서 낯선 음식을 팔며 그 곳의 사람들과 잔잔한 추억을 쌓아가는 세 여자는 이런저런 사소한 일들을 겪으며 핀란드라는 여행지에서 삶의 특별한 감동을 경험한다. 거리를 두고 보면 낯선 사람이지만 음식을 통해 교감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사연을 서로 공유하면서 소통한다. 타인의 삶에 침투하는 일은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 음식이라는 공감대가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영화 속에서는 우울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자도 있고 가족 문제로 고민하는 남자도 있었다. 낯선 곳에서 만나 각자 타인의 인생을 엿보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마치 지금의 내 모습과 같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하루 하루 삶의 의미가 쌓아가는 나와 닮았다.  더군다나 그것이 먹을 것과 연관이 되면 더욱 따뜻하게 가슴에 남는 것을 경험한다.  

그동안 나를 챙겨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가끔씩 생각 날 때 안부를 묻곤 하던 중학교 친구가 아른거린다. 여행하는 중에 한번쯤은 엽서에 편지를 써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엽서니 우표니 살 기회가 없었다. 전주에서 산 작은 엽서에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읍에 도착해 경비를 아끼기 위해 찜질방에 머물기로 했다. 설 연휴라 찜질방은 한산했다.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혼자 온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었다. 아주머니는 근처 산을 오르고 내려오셨다고 했다. 서로 계란도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엽서를 쓰고 싶은 마음에 취침실로 들어갔다. 생각나는 대로 썼다. 

‘문득 네 생각이나 편지를 쓰고 있다...... 사실은 걸어서 해남까지 가는 중이야...... 조금 더 일찍 소식을 전하지 못해 미안해...... 서울에 가면 한번 보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쓰고 싶었지만 피로에 그만 잠이 몰려왔다. 사람들을 알아가고 그들과 온기를 나누는 일들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지금의 하루 하루가 모아져 먼 훗날 나에게 좋은 추억이 될 것이고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을 품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딱딱한 찜질방 바닥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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