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아버지는 명절 전 장날에 형제들의 발 크기를 손 뼘으로 치수를 재서 가늠해 가시곤 했다. 다 저녁쯤에 약조한 신발은 우리 앞에 왔지만, 대부분 발에 꼭 맞진 않았고 손가락 반 마디 정도는 컸다. 헐떡거리는 새 신발을 신고 다니다 얼추 발에 맞을 즈음에 신발이 닳아 헤지곤 했다. 내 위로 언니들이 많아서 인지 엄마는 어린 내게 치마보다는 바지를 많이 입혔고, 머리 또한 짧게 선머슴같이 깎아 데리고 다녔다.

옛 사진을 들여다보니 예쁘게 생긴 영락없는 사내아이다.

낡은 사진첩에서 발견한 유년의 나는 검은 상고머리에 아래위 같은 색상인 털실로 짠 윗옷과 바지를 입고 잠자리 날개 같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 곁에서 겸연쩍은 듯 입에 손가락을 물고 서 있다. 대고모할머니 딸인 당고모 결혼식장에서의 모습이다. 검은 암연 보자기를 쓰고 사진사가 한손에는 스위치를 들고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펑 소리에 놀란 눈빛과 어색함이 함께 찍혔다. 결혼식 일가친척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아이들은 신부 옆 맨 앞자리에 서서 찍기 마련이다. 다섯 살 인생은 제 행색이 창피하게 느껴져 주춤 거리며 어른들 사이로 숨었지만, 어김없이 재빠른 사진사의 손길에 이끌려 맨 앞에서 놀란 토끼눈을 해가지고 사진을 찍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은 꿈을 찍는 사진관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한 발자국을 남긴다. 그런데 선머슴의 옷차림과는 너무도 동떨어지게 내 발에 꽃신이 신겨 있다.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려 보이는 묘한 조화의 차림새다. 한 달 차이로 내가 언니로 불리게 된 작은집 사촌은 한집에서 자매처럼 컸다.

초등학교도 한반이었고, 등하교 시간도 늘 함께 했다. 다섯살 이던 어느 해 그 사촌이 홍역으로 몸져누웠다. 들끓는 열에 한여름이었지만 솜이불을 덮고 끙끙 앓았다. 딱히 시골에서 처방약도 없이 생으로 그 열을 감내하고 있던 차에 그의 외할머니가 걱정스런 마음에 한걸음에 다녀가시면서 그녀 머리맡에 새신 한 켤레를 선물로 놓고 갔다.

사촌은 새신에 정신을 빼앗겨 아픈 것도 잊었는지, 그 신발을 품속에 품은 채 어둔 방 윗목에서 홀로 누워 있었다. 어린 눈에도 황홀한 꽃그림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꽃신이었다. 나는 괜히 심통이 나서 그 신발을 빼앗아 신고 방안을 이리저리 다녔다. 아니나 다를까 내 못된 행동에 사촌은 목 놓아 울었고, 그 소리에 놀라 달려온 할머니에게 나는 혼 줄이 나 신발은 원래 주인에게 얌전히 돌아갔다.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떠 보니 내 머리맡에도 사촌 것과 똑같은 꽃신이 하나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분란이 된 꽃신을 아버지가 장에서 사온 것이다.

그 꽃신을 신고 동네 주위를 강아지처럼 돌아다녔다.

얼마 뒤 자리에서 일어난 사촌과 쌍둥이처럼 꽃신을 신고 새끼 염소를 따라 들판을 뛰었고, 씨알 굵은 알밤을 주우러 마을 뒷산을 헤매기도 했다.

훌쩍 몸과 마음이 자라던 바람의 시간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날개달린 헤르메스 신발이 등장한다. 헤르메스신은 여행, 유랑, 전달을 의미하는 신이다. 어린 날 내 꽃신은 날개 달린 헤르메스 신이었다.

나는 아직도 유년의 꽃신을 신고 정처 없이 어딘가로 흘러 다니고 싶다.

생의 유랑객으로 어느 날 하던 일도 뒤로한 채 목 스카프를 휘날리며 홀연히 머나먼 이방의 공간에 오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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