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자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떠한 운명을 지니고 있을까? 하고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겠지만 운명이라는 것의 실상을 보면 운명 그 자체에서는 아무런 선택 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명은 운성의 이치에서 비롯된 현상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는 것은 당연하고 물에서는 물고기가 서식하는 것도 당연하며 메마른 대지에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자신의 적당함을 얻어서 생육을 도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여는 것도 그렇고 물속에서 물고기가 노는 것도 그렇다. 이와 같이 운명은 운성(運性)의 이치에서 노니는 현상계(現象界)의 기운(氣運)이고 결과이며 영상(影像)이 되는 것이다.

자신은 얼마나 부귀한 삶을 누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할 때에 자신의 운명이 참다운 길을 갈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만약, 사람들에게 메마른 대지에서 어떻게 하면 맛있는 과일을 얻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한다면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運命)이 지나치게 험하고 메마르며 고달프고 음습하다고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할 때에 메마른 곳에서는 윤택함을 이끌고 음습한 곳에서는 건전한 기운을 이끌까? 하는 문제에서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서 왔음이 분명하겠지만 운명을 가꾸는 것은 자신의 일이 되는 것도 분명하다. 그리고 그 운명(運命)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도 분명하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현상(現象)은 물고기가 물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운명은 운성(運性)의 빛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또 물고기가 숨쉬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운명도 운성(運性)의 빛이 머물만한 맑은 곳을 찾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운(運)과 명(命)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과나무가 되어버린 곳에서 참외를 달라고 한들 어떻게 참외를 구할 수가 있을까? 이미 심었던 사과나무에서는 사과의 결실을 봐야하는 만족을 봐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과나무를 심어야 할 것인가? 참외를 심어야 할 것인가? 는 자신의 선택사랑인 것처럼 내가 재앙의 씨앗을 심느냐 아니면 복덕(福德)의 씨앗을 심느냐? 하는 것도 자신의 선택사항이 된다.

그리고 사과나무를 심었다면 사과가 열릴 수가 있게끔 가꾸는 일은 자신의 일이며 복덕(福德)의 씨앗을 심었다면 복(福)이 될 수가 있게끔 가꾸는 일도 자신의 일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떠한 화복(禍福)의 운명(運命)을 가졌느냐? 는 의미가 없다.

운명의 길흉(吉凶)은 지금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길(吉)도 되고 흉(凶)도 되는 것이지 흉이 길로 가지도 않고 길이 흉으로 가지도 않는다.

다만, 흉의 씨앗이 일어날지라도 자신이 가꾸기를 멈춘다면 흉도 멈추고 길의 씨앗이 생겨날지라도 자신이 가꾸기를 멈춘다면 길(吉)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길신과 흉신은 자라난 만큼을 심부름 하는 전령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든지 흉신(凶神)일까? 길신(吉神)일까? 를 먼저 생각을 하여야 하고 잘못된 길이다 싶으면 반드시 뉘우치고 고쳐야 한다.

무릇, 흉신과 길신은 촌각도 멈추지 않고 생산과 소멸을 계속 하고 있는 성실한 운명(運命)의 전령사이기 때문에 이때의 운(運)은 더욱 빛을 발하고 명(命)은 과일로 남는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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