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십삼일 째, 현실과 과거를 오갈 수 있는 거리(익산시 금마면~전주 한옥마을)

▲ ▲ 우비 입고 우산을 쓰고 전주로 가는 길에서.

한옥마을이라는 공간과 느낌에 열중해야지

 

●봄의 길목에서

하루에 대략 20km 씩을 걷기 때문에 무엇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밤에는 양념치킨을 사먹었다. 혼자 여행하며 모든 것을 혼자 하다 보니 어느새 치킨 한 마리도 혼자 먹게 되었다. 자고 일어나면 여지없이 후회를 하게 되는데 말이다. 

어제는 날이 맑아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숙소 문을 열고나오니 갑작스레 비가 많이 내렸다. 도저히 비를 뚫고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산을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에 숙소 주인 아저씨에게 “잠시 우산을 빌려주실 수 있나요? 우산을 사와야겠어요.”라고 했다.

아저씨는 인심 좋은 표정으로 웃으시며 내게 우산을 하나 건넸다.

“그냥 쓰고 가져가요. 뭘 그것 때문에 다시 오나…”

그렇게 선물 아닌 값진 선물이 된 우산을 손에 쥐어들고 가슴 벅찬 마음에 금마면을 벗어날 준비를 했다. 누구에게는 별 것 아닌 일상이지만 호의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 그 사소한 정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 덕분에 빗속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비는 내리지만 왠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산을 쓰고 거리로 나섰다. 내 머리는 우산으로 비를 가릴 수 있었지만 배낭이 자꾸 비를 맞아 운다. 배낭에도 우산을 씌어주려 해보지만 그러기에 우산이 너무 작았다. 우비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 충청도에서 눈을 맞을 때 우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는데 어느덧 눈이 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천원매장에 들러 성인용 투명우비를 하나 샀다. 배낭과 함께 입으니 안성맞춤이었다.

눈이 내려 몸이 얼 듯 추웠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비가와도 춥기보다는 쌀쌀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날씨였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 오고 있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계절의 중간 길목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전주까지 가는 날이다. 그동안 걸었던 코스에 비해 꽤 긴 거리인데 어두워지기 전에 전주로 들어가기 위해 부지런히 걸었다.

요즘 내 또래 사이에서 전주 한옥마을 이미지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SNS의 발달이 영향을 미친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전주 한옥마을이 친구들과 추억 쌓기 장소 이거나 남녀커플들의 기념 여행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보지 않은 전주에 대한 이미지가 친근하게 다가왔고 자주 가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전주 여행을 하고 SNS에 올리는 사진을 많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기 전, 학창시절에 알고 있던 전주 한옥마을에 대한 이미지와 분명히 달랐다. 언젠가 친구들과 전주에 한번 가야지, 혹은 남자친구와 한번 가야지 하고 마음먹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전주 이야기를 하는 탓에 오히려 매력을 잃었다고나 할까.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들고 너무나 친숙한 곳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하게 된 생각이다. 사진을 찍어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 같은 여행의 풍속도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 사진으로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하는 여행보다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는 여행을 통해 나만이 느끼는 어떤 기분이 더 중요하다는 것. 사진을 찍는 일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 공간에 열중해야지 라고 다짐하며 전주로 간다. 기대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속도를 냈다. 

한참을 걸었지만 겨우 전주시 끝자락에 도착했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 어디쯤 한옥마을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도시를 관통하며 걸었다. 한옥마을이 전주시 가운데에 딱 놓여있는 것을 보고 굉장히 신기했다. 한옥마을 바로 위에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장소가 있었다. 더욱 설레었다. 벌써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비는 그치지 않았다.

내리는 비와 함께 한옥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오래전 시대,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밤이면서 비까지 와서 그런지 길에 사람들도 드물었다. 걷는 길에 운동화로 물이 들어와 장화를 사 신었지만 바지가 다 젖었고 온 몸이 눅눅했다. 김광석 노래가 생각나는 그런 밤의 한옥마을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인도 여행 중에 알았던 분이 운영하던 여성 전용 게스트하우스를 소개받았다. 우선 예약된 숙소를 찾아 들어가 짐을 풀었다. 도미토리여서 방에는 나 말고 다른 분들의 짐이 한가득 있었다. 사람들은 저녁을 먹으러 간 것인지 짐을 풀 때는 혼자였다. 유일한 단벌 바지가 젖어 빨래방에 맡기고 실내에서 입는 반바지를 입어야 했다. 추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혼자 방안에서 죽치고 있을 수 없었다.

한겨울에 비록 반바지 차림이지만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으며 비가 내리는 한옥마을을 걷는 와중에 혼자 웃음이 나왔다. 우디 앨런이 감독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파리의 고즈넉함과 낭만을 즐기려던 주인공 길(오웰 윌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파리의 화려한 도시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했던 길의 약혼녀 이네즈(레이첼 맥아덤스)와 다르게 오래된 도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파리의 낭만을 즐기고 싶었던 길의 모습과 혼자 산책하는 나의 모습이 얼핏 겹쳐졌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주인공 길과 조우

소설가 길은 매일 밤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며 온갖 상상 속에 빠져 든다. 자정이 돼 종이 울리면 클래식 푸조가 나타나는데 그 차를 타고 간 곳은 1920년대의 파리다. 길이 늘 동경하던 문학적 감성이 풍부하던 딱 그 시대였다.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등 예술계의 거장들이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키워가던 1920년대 파리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 애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를 만나게 된 길은 예술과 낭만을 사랑하는 매혹적인 그녀에게 빠져들게 된다. 현실과 과거를 오가며 그녀를 통해 자신의 소설을 위한 소재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이야기다. 

빗물의 힘으로 전주의 오래전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던 나는 도저히 그 영화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파리에 있는 길이 된 것처럼 한옥마을의 밤거리를 혼자 배회하다 저녁을 먹었다.

방에 들어와 노트북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이 영화를 추가했다. 방에는 도미토리에 묵고 있는 다른 여자 분이 계셨다. 나보다 3살이 많은 언니인데 제주도가 고향이라고 했다. 섬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신기했다. 여행자들의 특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금방 친해지게 됐다. 내일은 늘 사람이 붐빈다는 유명 칼국수 집에 같이 가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거기는 혼자 테이블을 쓰기에는 눈치가 보이는 곳이라며.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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