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나는 일제강점기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유년시절 내 기억에 남는 것은 학교 갈 때 숙제로 피마자 씨를 따 모아 가져가던 일, 학교에서 한국말하다 들켜 그 벌로 남아서 교실청소 하던 생각이 난다. 학교에서는 늘 공부하는 날 보다 산에 올라 솔가지(광솔)따는 날이 더 많았다. 담임선생님은 피마자 씨와 솔가지는 기름을 짜서 군함과 비행기 기름으로 쓰는 것이라며 일본이 대동아 전쟁에서 꼭 이긴다고 했다.

그런데 1945년 8월에 들어 B-29 미국 비행기가 맑은 여름하늘에 하얀 선을 그리며 높이 날아가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리고 며칠이지나 일본 땅에 원자 폭탄이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8월 15일 날이었다. 동리 어른들이 느티나무 밑에 모여 12시에 일본천황이 항복을 했다는 방송이 나왔다며 웅성거렸다. 드디어 지나가는 자동차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다. 나도 어른들 틈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목이 터져라 고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민족은 36년간 일본 식민지배로 말과 글을 빼앗기며 징용에 끌려가고 농산물을 공출당하며 약소민족의 압박과 설음에서 해방이 된 것이다. 그 해방이 격동하는 광복 70년사의 시발점이다. 그 기쁨도 잠시 1945년 6·25동란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북한 김일성도당의 기습남침으로 일어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우방 16개국이 참전했고, 중공군이 가담해 1953년 7월 23일 휴전까지 3년6개월간 밀고 밀리는 전쟁의 참화 속에 국토는 재 더미로 변하고 국민의 삶은 처참했다. 이 시대의 국민정신은 남침을 한 북한공산 도배를 저주하는 반공정신이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한국 민주화의 계기 가된 4·19혁명은 3·15부정 선거에서 촉발됐고 당시 나는 군에서 투표권까지 박탈당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취직을 하니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전쟁의 폐허에서 가난의 굴레를 벗고 잘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이 자립(自立) 자조(自助)정신을 바탕으로 강력히 추진되었었다. 나는 당시 농업학교에서 새마을 교육을 담당하고 새 농민 교육에 앞장섰던 옛일을 기억한다. 혁명 정부는 극심한 반대에도 불고하고 경부 고속도로를 뚫어 국가 산업 발전과 교통문화의 대동맥을 열었다. 또 쌀 증산운동 으로 부족한 식량난도 극복했다.

광복70년! 격동기의 국민정신은 굳건한 반공정신과 근검절약으로 잘살아보자는 국민의 마음을 바탕으로 수출증대에 힘써 비약적 경제 발전을 가져 왔다. 우리는 처참한 전쟁의 재터 미에서 오천년 한국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한국에 고속 도로망이 거미줄같이 전국을 수놓고 자동차의 물결이 홍수처럼 넘치는 것만 보아도 우리 경제규모가 얼마나 커 졌는가. 60년대 1억달러 수출실적에 전 국민이 축제의 잔치를 열었다. 지금은 3천억달러가 넘는 세계 10대 교역 국가가 됐다. 실로 한강의 기적이라 할 만큼 고도 압축 성장을 해왔지만 아직 선진국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저성장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빠른 경제성장에 걸 맞는 국민의식수준 이 문제이다. 그것을 위해 단순히 해방을 경축하는 기념이 아닌 격동의 광복 70년을 돌아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싶다.

 -약력

 △제천시 덕산면 출생

 △충주 농업고등학교 교장 역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저서 수필집 ‘그리운 삶의 향기’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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