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사람들은 가끔씩 그 때에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하고 자신의 운명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씩 그 때에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자신의 인연을 후회하기도 한다. 또 변명을 하여 말하기를 그 때는 어쩔 수가 없었지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진실로 어쩔 수가 없었던 것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다만 그 때는 죽음조차도 각오를 할 수가 없었고 그 때는 욕심을 멈출 수가 없었으며 그 때는 성냄을 다스릴 수가 없었고 그 때는 두려움을 피할 수가 없었으며 그 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후회어린 말들을 이렇게 한다. 그 때에 그렇게 하였더라면 그 사람의 욕심과 성냄이 그러하다면 그 사람은 지금의 이것보다도 못한 형편을 유지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되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서도 그 실상을 좀 더 세세히 살펴보면 모든 것에는 변화의 여지가 얼마든지 존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운(運)에서 씨앗이 되고 그것이 자라고 결실의 명(命)이 될 때 까지는 얼마든지 도중에 멈출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때에도 그것을 멈출만한 고요가 없고 그것을 멈출만한 운성(運性)이 없으며 그것을 멈출만한 맑음이 없었을 뿐이다. 한편 세상의 많은 일들에서 작은 것도 그러하거니와 큰일에서도 마차가지로 어떠한 것이 무너질 때에는 작고 사소한 것에서 비롯하여 무너지기 시작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윗사람의 신임을 받고자 한다면 그 자신이 성실을 잃어서는 아니 되는 것처럼 하늘의 복을 받고자 한다면 복을 받을만한 자신의 행실(行實)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한 번의 불성실이 씨앗을 만들고 한 번의 부정한 행위가 씨앗을 만들며 사소한 잘못이 씨앗을 만들고 하찮고 소소한 일들이 씨앗을 만들 때에는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태산과도 같은 천운(天運)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운성(運性)을 지킬 수가 없다. 그래서 밖으로부터 흉신(凶神)이 찾아들고 내 안에서는 마(魔)가 자리를 하고 있지만은 흉신과 마가 그 자라남을 멈추지 않았을 때에 결국에 가서는 복된 삶마저 무너져서 고통스러운 명(命)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 아무리 흉(凶)한 삶을 가지고 태어났을지라도 남들보다도 성실을 소중하게 여기고 신임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정도를 꾸준히 행하였을 때에는 신임은 날로 자라게 되고 자신은 근면하고 성심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때에 마음에서는 복을 부르는 고요함을 보게 되고 영혼에서는 운성이 머무는 이치를 느끼며 무념에서는 이치를 깨닫는 맑음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과 영혼과 무념에서 보였던 고요가 훗날의 결실을 만들기 때문에 지금의 씨앗을 비유하여 운(運)이라고 하고 마음과 영혼과 무념에서 비롯된 올바른 정심(正心)이 지금의 결실로 보여 질 때에는 이것을 명(命)이라고 이름을 한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날 때부터 나빠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세상에 적응할 때부터 조금씩의 악습(惡習)을 익히다가 차츰 악습을 즐기며 더 나아가 악습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밟을 때에 운성(運性)의 빛이 차츰 흐려지고 그러다가 쇠퇴의 과정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흉신(凶神)과 마(魔)가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와서 자신의 운명(運命)까지도 파괴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운(運)이 자랄만한 여건을 멈추지 않았을 때에는 운(運)도 자라기를 멈추지 아니하고 운(運)이 자라기를 멈추지 않았을 때에는 그 명(命)에서도 그르치지 아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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