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홉째 날, 조선시대 사람들이 걷던 길을 걷다 (공주 임립미술관~논산시 광석면)

▲ 삼남길을 따라 논산으로 향하는 나의 뒷모습. 제제가 잠깐 들러 나를 배웅하며 찍은 사진이다.

즐거웠던 ‘삼남길’ 걷기, 밤이 되면서 공포로

겁을 먹기 시작하면 자신을 궁지로 내모는 듯하다

 

◇조선시대 10대 대로 중 가장 긴 ‘삼남길’

어느 순간부터 지도가 안내하는 차도 이외의 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쌩쌩 달리는 차에 지루함을 느꼈던 터일 것이다. 지도에 표시돼 있지만 안내는 되지 않는 길들을 걷다 만나는 풍경들은 보물찾기 같았다.

이러다 숲속에 숨겨진 성이라도 발견하는 것은 아닐지. 정형화된 국도를 벗어나 마을을 통과하는 샛길로 걷다보면 한국의 작은 마을들은 저마다 특색이 있는 듯 보인다. 간혹 길이 끊기기라도 하면 다시 국도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럴 때에는 골치가 아프다. 이 세상에 모든 길들이 이어져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수 도 있다. 이렇게 시골길을 찾아 걷다 우연히 ‘삼남길’이라는 것을 만났다.

표지석에 처음 보는 화살표가 양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그 화살표의 색은 한쪽은 초록, 한쪽은 주황색이었다. 다리 난간에는 같은 글자인 삼남길이 쓰여진 초록과 주황색의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대체 이게 뭘까? 신속하게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주로 왕래하던 옛길을 복원한 길 이름을 삼남길이라 하는데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를 잇는 길이라 하여 삼남길이라 한다. 조선시대 10대 대로 중 가장 긴 우리나라 대표 도보 길, 해남 땅끝 마을에서 시작해 서울 남대문까지 1천리에 이르는 삼남길은 한반도의 동맥과 같은 길이라고 설명돼 있다. 주황은 땅 끝, 녹색은 서울을 의미하고 세 개의 부메랑 표시는 ‘삼남길’을 뜻하며 조선시대의 삼남대로를 복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자동차들이 다니는 길이 생기기 전에 옛 사람들이 걸어서 한양을 가던 옛 길인 셈이다. 그렇다면 가장 짧은 코스의 길일 테고, 사람들이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인셈이다.

시골길이 걷고 싶어 자동차 도로를 벗어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우연히 만난 멋진 길인 셈이다. 이런 길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네이버 내비에 의존하지 않고 삼남길 코스를 택했을 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쉽다는 생각도 잠시. 삼남길을 따라 논산을 향해 10키로 쯤 걷다보니 날은 어두워지고 삼남길의 이정표는 마을이나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길로만 안내를 하고 있었다. 계속 이정표를 따라 걷다가는 길 위에서 밤을 맞이할 것 같은 공포가 밀려 왔다. 할 수 없이 다시 국도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왔다 갔다 여러번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갔다. 

논산시까지 가려고 했지만 목적지를 앞당겨야 했다. 해가 어두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이 없는 길에서 인터넷으로 숙소를 찾았다. 유일하게 발견한 모텔을 가기 위해 걸음이 빨라졌다. 겨울 해는 오후 6시가 넘자 어두워졌다.

겨우 숙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게까지 걸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지레 겁을 먹고 어두워지는 국도에서 빠르게 뛰어 숙소를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밖은 칠흙같이 어두워졌다. 길에서는 화물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낮이었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길인데 밤이라는 어둠 덕분에 국도에 홀로 있는 모텔에서 나는 겁을 먹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았지만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느끼고 있었다.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많이 머무는 모텔에서 왠지 모르게 방을 나서기가 쉽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 나갔다. 모델 옆 기사식당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서다. 배가 고픈 탓에 밥은 꿀맛이었다. 밥을 먹자마자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길가의 차소리들 때문에 쉽게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델마와 루이스’, 공포가 그녀들로 하여금 도망자로 만들어

영화<델마와 루이스, 리들리 스콧 감독, 1993년 작>에서 델마나 루이스가 된 기분이었다. 델마와 루이스라는 두 여인은 지친 일상을 떠나 하루 동안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휴게소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다.

전업 가정주부인 델마(지나 데이비스 분)는 덜렁대는 성격에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지만 남편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해 외출도 매번 허락을 받아야 하는 답답한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루이스(수잔 서랜든 분)는 웨이트레스를 직업으로 갖고 있는 여성으로 꼼꼼하고 이성적이지만, 식탁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기만 하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주말에 별장을 빌려 함께 지내기로 하고 가족에게는 각자 간단한 메모만을 남긴채 신나게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고속도로변 휴게실에 차를 세웠을 때 평범한 두 여인들의 여행길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의 긴 여로에 오른다. 남편으로부터의 해방감에 들뜬 델마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을 마시고 모르는 남자와 춤을 추나, 남자는 곧 치한으로 변해 주차장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강간하려하자 루이스가 권총을 가져와 그를 제지하고 델마를 구해준다. 그때 남자가 성적인 모욕을 가하자 루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총을 쏴 그를 살해한다. 즐거움으로 가득 찬 여행길은 이제 공포의 도주로 바뀌고 델마와 루이스는 극한 상황에 빠져든다. 더구나 루이스의 돈을 제이디(브래드 피트 분)라는 건달 청년이 훔쳐가는 바람에 이들은 돈 때문에 강도가 되기도 한다.

하루의 일탈을 꿈꾸던 두 여인은 한 번의 실수로 도망자 신세가 되고 행복했던 여행은 불안에 떠는 도망자가 된다. 그대로 경찰에 갔으면 정당방위가 되었을까? 일은 점점 커져 결국 델마와 루이스는 강도가 되는 등 새로운 사건과 범죄가 늘어나고 결국 계속 도망자 신세가 된다.

강력수배범이 된 그들은 그랜드 캐니언에서 경찰들에게 몰리게 되고 “앞으로만 가자”라는 델마의 말에 루이스는 델마의 손을 잡는다. 그녀들은 함께 그랜드 캐니언 벼랑 아래로 돌진한다. 둘은 자살을 택한 것이다.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을 놓아버린 델마와 루이스. 하지만 그들은 늘 반복되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한번쯤 자신들이 찾고 싶은 자유를 찾아 선택한 것이다. 결말이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녀들이 선택한 유일한 삶이었으므로 비극이라 할 수 있을까.

행복을 위해 떠난 여행에서 순식간에 공포스러운 도망자로 변한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잠깐 보았다. 사람은 겁을 먹기 시작하면 한없이 궁지로 자신을 내모는 듯하다. 차 소리와 어둠에서 겁을 먹은 나는 한없이 작아져만 갔다. 아침이 되면 또 다시 자신에 넘치겠지만 이 밤은 왠지 모를 두려움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마치 도망 다니는 사람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델마와 루이스 역시 겁을 먹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압박해온 공포가 그녀들로 하여금 더 멀리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니 어서 잠이나 들었으면 좋겠다.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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