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생명(生命)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보면 생(生)하는 순간은 죽음의 세계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죽음의 무(無)에서 생명이라는 명(命)을 받았을 때에 탄생의 기쁨을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때의 죽음에서는 생을 낳았다는 명을 다하고 생은 생으로써 삶을 살아야 하는 초운(初運)으로 남는다. 즉, 죽음의 상태에 있던 무(無)의 조건도 변화하였고 무(無)의 방식도 변화하였고 무(無)의 이유도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생명은 하나의 의미가 되고 가치창조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창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힘이 우주에너지요 마음의 에너지요 영혼의 에너지가 되는 기운(氣運)이다. 그리고 이때의 기운은 육신과 마음과 영혼의 교류작용을 돕는 힘이 된다. 다시 말해 운이라는 존재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운은 운성(運性)의 이치로 존재를 하다가 어떠한 조건과 상황과 이유가 변화 할 때에 운성은 운(運)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운성과 운명은 이치 속에서 이치로 머무느냐? 아니면 이치가 드러나서 현상계에 머무느냐? 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때에 운명은 현상계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현상계에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로 이치 속에서 존재할 때에는 운성이라고 한다.

다만, 운이 현상계에 머물지라도 명은 이치 속에 존재를 할 수가 있고 명이 현상계에서 머물지라도 운은 이치 속에서 존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나타나 있는 하나의 명은 지금 이전에서 시작한 과거의 운이 만들고 과거의 운은 과거 이전에 발생을 하였던 명에 의해서 방향을 설정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지금 이후의 명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운의 결정 소관이 되고 지금 진행하고 있는 운은 지금 이전에 발생하였던 명에 의해서 현재의 운이 진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운은 일 더하기 일의 법칙이 아닌 복합적이고 불 특성의 성격으로 발생을 하며 여기에서 어느 것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서 받아가는 명이 모두 다르게 된다.

이처럼 운과 명에서도 진행하는 시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존재하는 상황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이치와 현상계로 나눠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한편, 유(有)의 존재에서 죽음의 무(無)로 갈 때에도 운명은 함께 끝나는 것이지만 이것도 육체적인 조건과 삼차원적인 방식에서의 운명이 끝났을 뿐이지 영(靈)과 혼(魂)은 또 다른 무(無)의 세계에서 명과 운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받드는 명은 유(有)의 존재로 머물 때에 발생하였던 운이 명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사후세계라 하고 영(靈)의 세계라 이름을 한다.

결론적으로 운명을 표현할 때에는 좋고 나쁨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조건과 상황과 방향에 따라서 각기 다르고 자신의 선택적 사항에 따라서도 좋고 나쁨이 다르다. 그러므로 운명에서는 변화의 여지가 얼마든지 남아있기 때문에 좋다와 나쁘다 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운명에서도 대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이라는 존재에서의 가장 큰 운과 가장 큰 명을 생(生)과 사(死)라는 상황이 된다.

즉, 무(無)와 유(有)의 조건이라는 생명이 가장 큰 운명의 변화가 되고 큰 운명(運命)의 설정으로 개개인의 운명에서 대소(大小)의 차이가 끊임없이 반복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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