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지난달 초부터 근 한달을 충북의 종갓집을 찾아다녔다. 답사는 충북의 북부지역인 단양·제천지역부터 시작되었다. 그렇잖아도 수십년 만에 닥친 가뭄으로 충주댐 수위가 하한선 밑으로 떨어졌다 해서 상류인 이 지역을 다녀올 참이었다. 농부들은 가물어 애가 타는데 무슨 철없는 소리냐고 핀잔을 듣더라도 장마 지기 전, 꼭 한 번 다녀오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예전의 물길과 고향을 보고 싶어서였다.

살미를 지나면서부터 연일 떠들어대는 언론보도가 지나친 과장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허연 속살을 드러낸 수몰선은 산 중턱에 올라붙었고, 바다 같던 호수는 물이 빠져 초원으로 변해있었다. 가뭄은 강 상류로 올라가면서 더욱 심했다. 옛 집터가, 다리가, 신작로가 드러나 옛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날은 뜨겁고 가물어도 밭에서는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왠지 엉덩이가 따가웠다.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내가 먹는 밥과 반찬이 땡볕 아래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일하는 저들 덕분이란 생각이 들자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한 번도 무엇을 생산해 남에게 먹여본 적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런 마음으로 죄책감을 조금 줄여보는 것뿐이었다.

미리 연락해두었던 댐 인근의 수암 권상하 선생 종가를 찾아갔다. 수암 선생은 우암 송시열의 적통 제자로 370여 년 전 조선 중기의 대단한 유학자이다. 집에는 여든의 노종부가 홀로 계셨다. 연로하셨지만 그 모습에서 400년 가까이 내려오는 유학자 집안의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준비해간 내용을 여쭈며 녹취를 마친 다음 수암이 생전에 기거하던 한수재와 영정을 모셔둔 수암사로 올라갔다. 필요한 유물들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필요한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데 어느 틈엔가 웬 낯선 사내가 나타났다. 그때부터 사내에게 신경 쓰여 촬영은 뒷전이 돼 버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계속해서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었다. 여든의 노종부도 몹시 불안해했다. 나는 노종부께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또 수암사 대문을 안에서 걸고 그 안을 둘러보았다면 저런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때늦은 후회였다. 나는 그 사내가 들으라고 수암사 내 모든 유물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중이고, 현재 있는 유물들은 모두 모사품이라고 떠들어댔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진품이고 모조품이고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뭐라도 돈이 될 만하다 싶으면 숟가락 꽁대기까지 싹쓸이를 해간단다. 하기야 남의 조상 묘를 파고, 묏자리에 있는 석물까지 장비를 들이밀어 훔쳐가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 할까? 아무리 돈이 최고인 세상이라 해도 사람들이 염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몇 년 전 어느 시골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 도둑이 들었단다. 요즘 시골에는 집집마다 노인들뿐이다. 그러니 소리를 쳐도 도둑은 도망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도둑놈은 늙은 노부부를 자루 속에 넣고 주둥이를 묶은 다음 고추를 훔쳐갔다고 한다. 반항도 하지 못하는 노인에게 그런 무참한 짓을 한 도둑놈은 도둑놈도 아니다. 그런 행위는 인간임을 포기한 것이다.

수암사 앞마당에 세워놓은 사내의 트럭에는 온갖 고물들이 실려 있었다. 내가 수암사를 떠날 때까지도 사내는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노종부에게, “할머니! 저 여기 갔다가 곧바로 오겠습니다!”하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면소재지에 있는 지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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